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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혠나날 Mar 18. 2024

33살에 하는 아르바이트

An earnest young man.


즘 나의 일상은 대략 아래와 같다.


AM 05:00~05:30 기상 및 준비

AM 05:30~9:30 아르바이트

AM 10:00~PM 14:00 편입 수업

PM 14:00~15:00 점심

PM 15:00~19:00 자습

PM 19:00~20:00 이동 및 저녁

PM 20:00~21:30 영단어 암기

PM 22:00 or 23:00 취침



편입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나는 바로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를 들어갔다. 약 8년 만이었다.

이런저런 다양한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B마트 아르바이트’

집 근처였고, 시간도 하루에 3.5시간으로 공부와 병행하기에 괜찮아 보였기에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바로 지원했고 며칠 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차피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까지 사람을 상대하거나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고, 오랜 시간 앉아있어야 하므로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가 조화가 잘 맞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큰 착각이었다.)



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올리브영, PC방, 공공기관, 교복 판매, 백화점, 웨딩홀 서빙, 아시안 마트 캐셔, 전단지, 콜센터 등등.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 옛날이야기일 뿐, 회사 입사 후 몸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6시까지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기 위해선 집에서 5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 시간에는 버스가 없기 때문에 따릉이를 타고 간다. 어두컴컴한 새벽, 아무도 없는 도로를 홀로 달리다 보면 '역시 아직 청춘이다~!?'싶은 마음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새벽임에도 언제나 도로에는 차들이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따릉이 대신 뚜벅이로 터벅터벅 걸어가곤 하는데 항상 사람들을 여럿 마주친다. ‘다들 어딜 가는 걸까, 아니면 갔다 오는 걸까.’ 그들의 동선을 상상해 보며 내 동선을 열심히 밟는다. 나의 하루만큼이나 일찍 시작하는 그들의 하루. 다들 분주히 움직인다.





B마트 아르바이트는 사실 물류창고 아르바이트인데, 물류창고에서 일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건을 옮기고 입고하고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아, 나는 그동안 얼마나 평온한 쉼터에서 놀고먹었던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하니까 움직이는 아르바이트를 하자.'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아래에서부터 오는 노동의 소중함. 그렇지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최저시급의 일들.

역시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은 사무직보다 더 힘이 든다. 지속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지속가능함은 일을 하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인데, 콜센터와 물류창고 모두 익숙해질 순 있어도, 발전할 수는 없다. 그곳에서의 깨달음은 필시 어느 순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일들은 모두 최저 시급에 가깝다.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그 누구로라도 대체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달리 육체노동에 더 각박한 것이 우리나라인 듯하다.

물류 창고일과 가장 비슷했던 호주 아시안 마트 캐셔는 8년 전 시급이 지금 일하고 있는 물류센터보다 1.5배 높았다. 누구 하나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좀먹는 일임에도 이 정도 시급밖에 매겨지지 않는 현실이 조금 서글프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일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역시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거운 박스를 지고 나르고, 상자 포장을 까고 물건을 채워 넣는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알아보고, “파트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하고 물어볼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왠지 멋쩍고 부끄러울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박스의 테이프를 까고 정리하며 ‘나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고 느꼈다.


무거운 음료수가 든 상자를 끙차 들고 사다리를 가져와 내 키보다 높은 선반에 올려두며 생각한다.

‘회사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내가 그 말을 손수 실천하는구나’ 불나방처럼 불이 있는 곳으로 자진하여 뛰어드는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또 가끔 영하 20도의 냉동창고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헤치며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다 보면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고 괴리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다시 머리에 붙은 얼음을 세차게 흔들곤 정신승리를 해본다.

'아니야. 도전하는 삶. 그게 바로 청춘이다!!'



그렇지만 나의 최근 근황을 듣는 친구들은 한결같이 ‘청춘’이나 ‘낭만’을 떠올리기보단 안타까워하곤 한다.

나를 아껴서, 작년과의 괴리감에, 그리고 지금 현재 그들과의 거리감에 더더욱 차이를 크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낭만 있는 고생 같은 것에는 조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어리고, 기한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매몰되지 않아야 하고, 주변은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조건이 많은 낭만이라면 어쩌면 처음부터 헛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낭만은 무슨.


그래도 그냥 나 스스로를 An earnest young man. 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하루 주어진 것에 집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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