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전의 글에서 동물이 갖는 기억이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기억이라는 능력은 신경 세포의 연결성의 변화로 인하여 가능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소개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를 되짚어 가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구체화시킨 과학자들과 실험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 언급한, 시냅스 변화를 검정하는 실험으로 바로 넘어가기 전에, 기억 연구의 역사에 대한 큰 그림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서 이번 주제는 처음으로 2 개의 글을 넘어가게 되었다!
지몬: 엔그램engram 개념의 탄생
기억이 모종의 방식을 통해 뇌에 저장될 것이라는 생각은 이전 시간에 소개한 헵의 생각보다 (당연히도) 훨씬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고전 그리스 시대까지). 그러나 이를 체계적인 이론으로 묶어 내고, 가설을 제시한 사람은 리하르트 지몬(Richard Semon) 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100년도 더 이전, 지몬은 우리의 뇌에 특정한 자극이 가해질 때 나타나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며, 이것이 기억의 물질적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1904년에, 지몬이 이것을 '엔그램engram' 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또한 이 엔그램을 외부의 회상 자극에 의해 다시 '꺼내 오는' 것을 에크포리ecphory 라고 지칭하였다. 이전 글에서 살펴 본 것과 비슷한 현대적 개념을 처음 정의하고 가설을 세웠기에 지몬은 엔그램 연구의 시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 1. 엔그램에 기여한 7명의 학자들. 본 글에서는 지몬, 래슐리, 헵, 펜필드와 밀러만 다룬다(좌측 상단부터 순서대로). (출처, Josselyn, 2015)
그러나, 이 엔그램이라는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비판을 받아 왔으며 학계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1900년대 초는 뇌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뇌가 단일 세포로 이루어진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파벌이 갈려 논쟁하던 시기고, 그 세포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알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래슐리: 뇌의 어느 지역이 기억을 담당하는가?
쓸쓸하게 잊혀 가던 이 문제를 물려받은 사람은 미국의 칼 래슐리(Karl Lashely)라는 과학자였다. 래슐리는 인간의 뇌가 손상될 때 어떤 일이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던 하버드 대학의 생리학자 셰퍼드 프란츠(Shepherd Franz) 의 제자였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래슐리는 실험 동물로 사용한 쥐의 뇌에 손상을 주며, 어느 부분이 기억에 관여할지에 대해 실험을 진행했다. 논리는 간단한데, 뇌의 A 지역을 수술적으로 제거하거나 손상을 주었을 때 기억이 사라진다면 A 지역이 바로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리라는 생각에 입각한 것이다(미주 2).
기억과 같은 복잡한 인지 기능은 뇌 가장 바깥쪽 피질에 저장되리라고 생각한 래슐리는 피질의 온갖 부분을 다르게 절제해 보며 쥐의 기억이 얼마나 손상받는지를 측정하였는데(그림 2), 그가 찾아낸 것은 기억을 담는 특정한 장소는 없다는 것이었다. 피질의 어느 부위이든 손상을 받으면 기억의 손상이 일어났으며, 손상이 크면 클수록 기억은 더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래슐리는 <기억의 흔적, 즉 엔그램은 피질에 골고루 펼쳐져 분산 저장되어 있다> 고 주장하며 엔그램이라는 용어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림 2. 서로 다른 뇌의 피질을 절제하며 기억의 저장 장소를 찾고자 했던 래슐리는 후대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헵 그리고 펜필드: 기억은 측두엽에 저장된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했던 도널드 헵(Donald Hebb) 이 등장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달하우지 대학을 졸업한(그리고 맥길과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헵은 래슐리의 제자였는데, 미국-캐나다 출신의 신경외과의사인 와이더 펜필드(Wilder Penfield; 미주 3) 를 만나 같이 기억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펜필드는 초창기 신경외과의로 많은 기술들을 개발하여 응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환자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뇌에 미세한 자극을 주어(미주 4) 환자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기록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다양한 곳에 자극을 주던 펜필드는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하게 되는데(그림 3), 측두엽(머리의 양쪽 겉 부분에 해당, 대충 관자놀이 근처이다) 안쪽의 특정 장소에 전기 자극을 주면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옛 기억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한 환자의 측두엽을 자극했을 때 환자가 “어머니가 제 형제가 코트를 뒤집어 입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냥 정말 그런 소리가 들려요” 와 같이 과거의 회상을 떠올리고 생생히 경험하는 것을 보고했다.
그림 3. 펜필드가 환자의 뇌를 자극하며 찾아낸 신체 호문쿨루스. 피질의 영역에 따라 신체의 크기를 맞추어 그리면 좌측과 같이 된다. 미주 3 참조.
밀러와 스코빌, 그리고 H.M. : 해마가 중요하다
이는 래슐리가 놓친, 인간의 측두엽 깊숙히 있는 어딘가에 우리의 기억이 저장될 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캠브릿지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하고 맥길 대학교로 옮겨 와 헵의 제자가 된 브렌다 밀러(Brenda Milner) 는 측두엽과 기억의 연관성을 파고들었다. 밀러는 윌리엄 스코빌이라고 하는 신경과 의사의 놀라운 환자를 전해 듣게 되었는데, 이 환자는 아마 신경과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일 것이다. 바로 H.M. 이다(그림 4,미주 5). H.M 은 어릴 적 자전거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 계속된 뇌전증 발작을 겪게 되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코빌은 1949년 H.M 의 양측 측두엽을 수술로 절제하게 되었다. 그 수술 이후, H.M 은 과거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림 4. 젊을 적과 노인기의 H.M.
H.M 은 다른 지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매일 만나는 의사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이름을 물었으며, 대화 내용도 기억하지 못했고, 조금 전 식사를 했는지의 여부도 기억하지 못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지 못해 늘 묻곤 했다. 그러나 수술 이전의 기억은 대체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H.M 에게서 절제된 부위가 ‘새로운 기억의 형성’ 을 담당하는 부위라는 것을 시사했다(그림 5). 이 부위는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할 뇌 부위 중 하나일 테다. 바로 해마다.
그림 5. H.M. 사후, 그의 뇌는 뇌과학 연구를 위해 기증되어 얇은 절편으로 제작되었다(좌). 그의 뇌에서 절개된 해마(와 내측 측두엽) 을 볼 수 있다(우).
우리 머릿속의 해마: 영원한 미스터리?
해마는 마치 물 속에 사는 해마처럼 얇고 꼬인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그림 6), 우리의 뇌 바닥 쪽, 안쪽 깊숙히 양쪽에 하나씩 들어 있다(그것이 래슐리가 기억의 저장 장소를 뇌 바깥쪽에서 찾지 못했던 이유다. 그는 피질 안쪽 깊숙히 절제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 구조물이 밝혀지다니! 뇌과학자들은 이 곳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나 큰 야망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뉴욕 의대에 재학 중이던 에릭 칸델(Eric Kandel)이다.
그림 6. 우리 뇌의 해마(왼쪽) 과 바닷속 동물 해마(오른쪽). 허투루 붙인 이름은 아닌 듯하다. 커버 사진은 카할의 해마 그림이다. 다음 글에서 볼 일이 있을 테다.
프로히트 심리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칸델이 구체적인 물질적 기원을 찾기 위해 뇌로 눈길을 돌리던 순간에, H.M 에 대한 스코빌과 밀러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칸델은 해마의 신경 세포들에 작은 전극을 찔러 넣으며 이 세포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기록해 기억의 메커니즘을 연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술로는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을 깨달은 칸델은 선배 과학자들을 따라 더 간단한 모델 생명체(model organism) 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 달팽이라고 불리는 군소였다(그림 7).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은 달팽이에서 어떻게 인간의 기억을 연구할 수 있는지 비관적인 시선을 던졌지만, 칸델은 도전을 시작했다.
그림 7. 에릭 칸델이 기억에 대해 연구한 모델 생명체, 군소aplysia. 이 별 것 아니어 보이는 생명체가 무엇을 알려 줄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백 년간의 역사를 훑어보며, 기억의 과학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하여 아주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제자와 스승으로 이어지는 관계들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칸델이 군소를 연구하며 밝힌 시냅스의 메커니즘들과 함께, 기억에 대한 최신 연구들을 살펴본다. 흥미로울 것이다.
미주 Endnote
미주 1. 프랑스의 소설가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특히나 기억과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소설로 유명하다. 특히나 그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유명해져 "마들렌 효과" 또는 "프루스트 효과" 라고 불린다. 이는 실험을 통해서도 여러 번 검증되었는데, 특히나 후각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뇌와의 직통 라인이 존재하는 유일한 감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감각 정보들은 뇌의 중간 처리 기점인 시상을 거치는 반면, 후각 정보는 바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감정 및 공포 반응의 중추인 편도체로 전달된다.
미주 2. 이러한 연구를 병변 연구lesion study라고 뷰르는데, 뇌의 무한한 복잡성을 조금씩 파고 들어가게 만들어 준 초창기 기법이다. 특히나 뇌졸중이나 사고 등으로 뇌의 특정 영역이 손상된 환자들의 증상을 관찰하는 것은 뇌 기능에 대한 놀라운 통찰의 근원이 되어 왔다. 복잡한 생체의 기능을 연구하기 위해 인위적인 파괴를 유도하는 것은 생명 현상 연구에 있어 매우 흔한데, 대표적으로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DNA 손상성 물질을 처리하여 유전자를 망가뜨린 초파리를 만들고, 해당 파리의 행동이나 발달을 살펴보는 연구가 전통적으로 수행되어 왔다. 39번 글의 7번 미주도 같이 참고하라.
미주 3. 펜필드는 아래 기술한 깨어 있는 상태의 뇌 자극을 통해 뇌 호문쿨루스를 찾아 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정확히는 최초로 인간에서 찾아낸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웨이드 마셜은 원숭이에서 해당 호문쿨루스를 찾아냈다). 우리의 뇌 겉부분(피질)의 중앙에는 일렬로 배열된 피질이 있는데, 이곳을 자극하면 환자들은 특정한 신체 부위에 감각을 느낀다. 신기하게도, 손에 해당하는 뇌 피질 옆에는 팔에 해당하는 피질이, 발에 해당하는 피질 옆에는 종아리와 허벅지에 해당하는 피질이 있는 등 이 피질은 신체의 구성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약간의 예외는 있다). 이것이 마치 작은 난쟁이(호문쿨루스) 가 뇌에 존재하는 듯 하다고 하여 우리는 이것을 감각 호문쿨루스라고 부른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 이 피질의 영역 크기에 맞추어 신체를 그리면 손과 얼굴이 엄청나게 큰 비정상적인 형태가 되는데, 이는 감각의 민감성을 대변한다. 손과 얼굴은 아주 작은 차이도 느낄 만큼 민감한 반면 우리의 등은 그렇지 않다.
미주 4. 끔찍한 수술로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여전히 현대 수술실에서도 행해지는 일이다. 뇌전증(간질 발작) 을 심하게 앓는 환자들은 이 뇌전증의 원인이 되는 뇌 조직을 미세하게 절제하는 수술을 받게 되는데, 이 때 꼭 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뇌를 자극하거나 기록하며 해당 지역이 어느 부위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필수적이다. 뇌 자체에는 통증 수용기가 없기 때문에, 환자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두통은 뇌를 “싸고 있는 막” 인 뇌척수막에서 느껴진다).
미주 5. 환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이처럼 논문 등지에는 이니셜로 알려지게 되는데, H.M 사후 본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 이다. 이처럼 뜻밖의 환자를 통해 뇌과학은 많은 진보를 하게 되었는데(미주 2를 참고하라), 대표적인 유명한 환자들로는 전두엽이 손상된 P.G, 편도체가 손상된 S.M 등이 있다.
* 참고 문헌: 엔그램 연구 역사에 대한 논문을 잘 번역한 국내 문서가 있어, 초기 연구의 계보에 대한 틀을 참고하였다: http://whatishuman.net/wave/06/04. 원문은 Josselyn et al., 2017, J. Neurosci. 또한 같은 저자의 다른 리뷰 논문, Josselyn, 2015, Nat. Rev. Neurosci 도 참고하라(여기서는 최신 연구 기법 및 분자생물학적 실험들에 논의의 쟁점을 맞추었다).
또한, 이번 글과 다음 글에 있어 에릭 칸델의 “기억을 찾아서” (알에이치코리아, 전대호 역, 2014) 를 참고하였으며 또한 일독을 권한다. 그의 놀라운 통찰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과학자에게도 그리고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신경과학의 태동부터 현재까지를 지켜보며 70년 이상 현장에 몸담은, 그리고 여전히 꾸준히 저술을 내고 있는 칸델은 내가 존경하는 과학자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