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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노운즈 Mar 20. 2024

어른 됨엔 왜 매뉴얼이 없는 걸까?

어른에게도 응원이 필요해요.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형편에 벗어나지만 많은 가족이 머무를 수 있는 큰 집을 신혼집으로 마련한다.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해리엇은 빅토리아풍 주택에서 여러 아이를 낳고 가족과 친지들이 가득 모여 북적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면서 그녀의 꿈은 서서히 무너진다. 3개월에 연년생 형의 팔을 잡아 다치게 할 정도의 괴력을 지녔으며, 한 살엔 개와 고양이의 목을 졸라 죽일 정도의 잔인함을 가진 벤. 해리엇은 벤을 가족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벤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벤과도 어떻다 할 유대를 만들지 못한 채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에게 과연 어떤 선택이 정답이었을까? 당신이 해리엇이라면 한 자녀를 외면한 채 가족들과 행복할 수 있겠는가? 혹은 그 아이와 함께함으로 인해 남은 가족들을 잃어야 한다면, 그것 또한 감당할 수 있겠는가?



p.87, p.93,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줄리 필립스가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에서 “공적인 생활에서 성공을 거두거나, 좋은 책의 작가가 되고, 부모가 되거나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은 제각기 별개의 과업이다.”라고 말했듯이, 어른의 역할들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데다, 시간이라는 자원에서 상호배타적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돌한다. 헤르미온느의 ‘마법 시계’도 없이,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훈련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문제들에 적절히 대처하며, 해내야 할 ‘모든’ 과업에 성공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어른의 삶은 준비할 틈 없이 습격하는 사건의 연속이고, 결국 우리는 늘 압도당한다. 선택을 종용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찰나도 허락하지 않고 동시에 다가온다. 선택할 때엔 옳다고 확신하며 내가 고른 선택이라고 믿지만, 이것도 되돌아보면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제한된 선택이다. 게다가 막을 수 없는 불행이라도 맞닥뜨리게 된다면? 또는 조금 덜 불행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해리엇은 열심히 살았지만,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기대와 너무나도 멀었다.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벤을 '사회화'하는 것도 실패했다. 이러한 불행이 과연 그녀의 잘못된 선택 탓일까?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불행-기대하며 낳은 아이가 야생 짐승의 기질을 지님-은 해리엇의 삶을 휩쓸어버린다.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벤을 '버리지 않은' 그녀에 대한 가족들의 실망과 비판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온 가족의 희생-어떤 방식이든 가족 모두 불행해졌으니 희생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에도 불구하고 벤은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끝까지 혈연의 끈을 놓지 못하던 해리엇에게도 벤은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전이란 없다. 그래서일까? 레싱의 소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내가 해리엇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가 나의 내담자였다면 어떤 조언을 했을까? 자식을 포기하지 않은 엄마이길 선택한다면 그녀는 가벼운 불행-늘 불행하지만 죄책감은 덜 느껴지는-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6살 난 벤을 수용소에 버려두었다면 해리엇은 분명 무거운 행복-행복한 순간을 누리며 살지만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죄책감 또한 감당해야 하는-을 버텨야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벤의 생각이 궁금했다. 벤은 무엇을 더 나았다고 여길까? 벤은 해리엇의 어떤 선택을 더 기꺼워했을까?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심리학자들은 우리들이 정해진 발달과업을 성공해 내면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총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성취해야 할 덕목을 나열했다. 이에 따르면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분명히 노력한다. 친지들을 초대하고, 아이들을 아끼고, 서로를 이해하고 돌본다. 그들이 바라는 형태의 '친밀감'과 '생산성'의 '발달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약간의 빚-부모에게 도움을 받고 자기 자신을 덜 돌본다-을 감당하지만 네번째 아이인 폴이 태어날 때까지 이 위태로운 균형에 큰 무리가 없다. 이때만 해도 그들은 성인 전기와 중기의 발달과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한 방울의 물로 컵의 물이 넘쳐흐르듯, 이 아슬아슬함이 벤의 탄생으로 깨어진다. 발달의 6단계와 7단계 어느 즈음에서 해리엇은 성장 미션에 실패하고 만다.


인생 초반의 20년을 5단계로 촘촘히 나눈 에릭슨은 성인 이후의 긴긴 세월-기대수명을 80으로 잡아도 대략 60년인데-을 성인기, 중년기, 노년기의 3단계로 느슨하게 나눈다. 밥을 먹으면 키가 크고 공부 시간이 늘어나면 성적이 오르는 선형적 인생을 살아가는 시기, 성장과 사회화 정도로 과업이 제한된 시기, 인풋과 아웃풋의 상관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유년시절이 끝난 성인기 이후의 발달은 단계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다른 이론가들도 별다르지 않다. 성인기 이후의 인생 단계를 촘촘히 구분한 심리학자는 없다.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 단계도 청소년기까지의 발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발달심리학도 영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에 많은 장을 할애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영유아기의 발달처럼 월령별 육아 가이드식의 발달 단계 설계를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심리학에 자기 계발이라는 분야가 생기고,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을 갈무리하여 훌륭한 어른이 되는 꿀팁을 대방출한다. 자발적인 동기를 갖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좋은 생각을 하고, 생각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조언들은 훌륭한 어른이 되는 빠른, 혹은 손쉬운 방법을 왜 아직도 시작하지 않냐며 우리를 다그친다. 기능과 역할의 관점으로 그려진 좋은 어른의 청사진은 우리가 기능과 역량, 전문성의 향상을 통해 어른 됨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해리엇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봐도 충분하다. 꼭 어디에선가 걸려 넘어진다.


삶은 우리의 기대를 거절하고, 목표한 바를 잘라내며, 새로운 방향을 찾으라 강제하고, 몇몇 계획은 취소시키며, 자잘한 일과를 끊임없이 수정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시간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내며 인생을 살아낸다. 기특하게도. 특별히 일찍 눈이 떠진 오늘 아침 개운하게 씻고 나와 아침 준비를 하려는데 막내가 일어나 삼십 분 동안 생떼를 쓰며 고함을 친다. 일찍 일어난 상쾌함과 뿌듯함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지만, 이런 날도 나의 삶의 '사소한' 일이라 버틸만하다고 되뇌며 정신승리를 한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주물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틀이 되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를 이끈다. 내가 인생을 사는 것인가? 인생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가?






책장에 꽂힌 공부법 관련 책들(이렇게만 하면 우리 아이도 서울대 갈듯한 느낌!)



이렇듯 옳고 그름, 시작과 끝, 선과 악, 유쾌와 불쾌가 혼재되어 있는 어른의 일상에 어떻게 정해진 매뉴얼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먹고, 놀아주고, 재워라-젖을 먹여 재워버릇하면 하루종일 재우다 끝나니까-'라는 간단한 영아 돌봄 매뉴얼조차 실행이 불가능하던데! 영아기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엔 이렇게 해야 한다, 동기가 낮은 아이는 이렇게 다독여봐라, 감정을 이렇게 코칭해 줘라!' 책에 눈을 두었을 때 우리는 정답을 얻었다는 기쁨과 곧 모든 문제가 사라질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흥분한다. 그러나 곧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해내기 어렵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고양감은 부담감과 자책으로 변신한다. 결국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문제아’라고 스스로-또는 자녀를- 비난하며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난다.






삶에서 멀어진 법칙-누군가가 자기 인생에서 실현해 낸 성공, 입시, 투자의 성공법칙-을 재현하여 성공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해리엇의 인생에선 벤과 함께 함이 성공이었고, 오늘 아침의 나는 아이들을 잘 버텨내고 출근하는 것이 성공이었든, 행복한 삶이나 불행한 삶이란 좋고 나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하나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성공한 삶처럼 성공이 없는 삶도 무엇이 더 훌륭하고 무엇이 덜 훌륭함을 떠나 그저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국 『다섯째 아이』도 씁쓸한 결말이 아니라 그저 어느 누군가의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삶 정도로 동정을 배제한 채 바라봐야 하는 건 아닐까?



p.75,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민음사.



루이제 진저는『삶의 한가운데서』에서 니나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양이 발걸음처럼 사는 법을 배우게 되지. 점점 조용하게, 점점 더 절대성은 없어지지. 이것은 또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징조야. 나는 얼른 늙었으면 좋겠어." 문학이 보여주는 삶에서 나는 '절대성'을 불신하게 되었다. 나도 늙어가고 있나보다.


어른 됨에 대하여 심리학자들은 야심 찼고, 문학가들은 은유했다. 철학자들은 모호하고, 실천가들은 유혹한다. 정답을 찾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 아닐까? 누구에겐 정답이 누구에겐 오답으로 비친다면, 과연 그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에 골몰하며 매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맬 우리-또는 나만?-를 위해 레싱은 이 질문의 해답을 이렇게 그려낸다.



p.153, p.157,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해리엇은 벤을 진료한 의사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는 그런 말을 누가 했으면 하고 원하는 거예요. 난 그런 사실이 인정되기를 원해요.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난 참을 수가 없어요." 해리엇은 의사의 '옳다는 승인'을 받은 후 주저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벤에게 투여할 '진짜로 강력한 진정제'를 달라고!


이제는 조금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른 됨의 매뉴얼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오류다. 각자의 삶을 살아온 나 자신이 곧 매뉴얼이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 수 없는, 지름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 분별할 수 없는, 과거는 기록되었고 미래는 흰 백지인 매뉴얼. 삶의 여정이 매일매일 각자의 매뉴얼에 기록되고 있다. 매뉴얼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름사니가 장대 하나에 의지해 긴 줄을 건너 내려온 다음에야 균형 잡기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듯.


이젠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다른 차원의 매뉴얼을 만들어가는 서로에게 조금은 다정한 눈으로, 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응원을 건내보려고 한다. 자기실현에서 ‘완전성’이 아니라 ‘원만성’을 추구하라는 융의 혜안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완벽한 매뉴얼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다간 결국 조지 버나드 쇼의 비문에 적인 후회를 되뇌이며 눈을 감게 될 것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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