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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노운즈 Mar 13. 2024

어른 됨, 투사로부터 독립하기.

사회화와 개성화의 모호한 경계, 혼란스러운 어른의 마음



이사도라 덩컨과 최승희는 친구에게 빌려주고 없지만... 웅진바투바투인물이야기


아이 책장에 꽂힌 위인전집을 둘러보다 생경한 인물들을 만났다. 제인구달, 이사도라 덩컨, 코코 샤넬! 흥미가 생겨 그 자리에서 책을 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성 위인의 판도가 달라졌구나!’


여성도 ‘돌봄’이 아닌 영역에서 위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 여성을 위인전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고, 그녀들의 성공은 사회에 도움이 되었다. 개성화와 생산성의 통합! 제목들을 둘러보다 ‘마리 퀴리’라는 책 제목에 눈길이 머물렀다. 나에겐 '퀴리 부인'이 익숙했지만, 왠지 속이 시원했다. '현모양처'가 핵심이고 업적은 옵션이라고 생각했던 여성위인에 대한 도그마가 깨졌다.






p. 51,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 그는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업무-필경사가 '필사'를 거부하는 건 좀...-를 거절하고, 결국 해고당한 뒤, 사무실을 무단검거한 채 마치 자신이 원래 그곳의 주인인양 머문다. 내가 바틀비를 고용한 사장이거나 바틀비와 업무를 나눠야 하는 동료라면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폭발할 지경이 되는 게 당연할 텐데, 소설을 다 읽고 저녁 준비를 하러 부엌에 들어가며 '저녁 준비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혼자 피식거리며 웃는 나를 발견한다. 또 속이 시원했다. 책을 읽는 동안 바틀비를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따라 말해 보니 그가 이해가 되었다.


성장이란 사회화의 과정이다. 사회가 원하는 모습은 내 것으로, 사회가 거부하는 행동은 가려내어 감추는 것이 곧 ‘사회화’이다. 부모에게 받은 훈육, 학교에서 받은 교육,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 이 모든 것이 사회화의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사회화 과정에서 숨기는 데 성공한 나의 부분들은 영원히 사라지는 걸까? 융은 성장의 과정에서 가려낸 것들이 모여 ‘그림자’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평상시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술에 취한 어느 날, 지속된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어느 날, 그림자는 '자아'라는 수문장이 취약해지는 틈을 타 행동화된다. 물론 우리의 그림자가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투사’를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투사는 나의 성향이나 특성을 남의 것으로 여기는 무의식의 방어기제이다.


엄마가 되고 분개했던 표현 중에 ‘경력 단절 여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큰아이를 돌보는 일은 나에게 큰 충만감을 주었지만, 한편으론 ‘경력단절이란 쓸모없는 상태를 의미함’이라는 판단이 나를 짓눌렀다. 이 단어를 뉴스에서 들을 때마다 반감이 올라왔다. ‘내 경력을 왜 자기들이 관리하고 난리야?’, ‘경력은 단절되면 안 돼? 꼭 연결되어야 해?’, ‘왜 경력 단절 여성은 있으면서 경력 단절 남성은 없어!’ 이런 단어를 만들어낸 사회가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떤 여성들에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인사고과에서의 불이익이 삶과 직결될 수 있고, 이것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슈이다. '경력 단절 여성'은 사실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다정한 단어이다. 그 당시 나는 ‘경력 단절’이란 단어의 '무례함'에 화가 나 있었지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 당시 내가 불만족스러웠다.



p.463,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줄리 필립스. 돌고래.



마리나 츠베타예바가 말했듯 “어머니의 시간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시간이지, 생각할 시간이 아닌"데도, 돌봄에 헌신하는 나에게 나는 '생각 없이 하루를 허비한다'라고 탓했다. 내가 나에게 무례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분노를 '경력 단절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회에 투사했다. 사회가 나에게 짐을 짊어지게 했다고 비난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하등 하다'는 사회화 과정에서 꿀떡 삼킨 신념이 출산과 육아의 시간도 -자본주의식으로-생산적인 척 허둥지둥 포장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 바틀비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의 방식대로 살아보는 것도 좋았을 텐데... '경력을 쌓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우리도 투사를 하지만, 사회도 우리에게 투사를 한다.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식당에서 아이가 큰 소리로 울면 아이도 달래지 못하는 부모가 되고, 조용히 시키기 위해 핸드폰을 쥐여주면 아이를 미디어중독으로 내모는 부모가 된다. 저출산을 걱정하지만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는 발소리를 견디기 도 어려워한다. 유아동기 자녀를 길러본 부모들은 공감하겠지만, 뛰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아이들은 뛴다-성장기의 본능이라-. 대체로 이런 문제들은 자녀가 사춘기가 되면 사라진다-해결된다기보단... 그땐 부모랑 같이 안 다니니까, 몸이 무거워져서 뛰지 않으니까, 말 그대로 사라진다-.


본론으로 돌아와, 개성화는 사회의 투사를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고로 원망하지 않고-, 고운 체에 걸러진 나만의 열망만을 내 안에 담을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아니, 나만의 열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개성화라고 해야겠다. 죽음이 노크할 때까지 내가 누군지 알기도 어려운데 나를 알아가려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상하지 않은가!



p.74, 바베트의 만찬, 이자크 디네센. 문학동네.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에 등장하는 바베트는 자신이 모시는 자매의 손님맞이-정확하겐 자매의 아버지인 목사의 기일 만찬-에 자신이 가진 돈 전부를 써버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자매가 앞으로 '가난하게' 살게 될 바베트를 걱정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에요, 전 절대로 가난하지 않아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마님. 예술가들에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나만큼은 그 '위대함'을 확신하는 것. 사회의 기대를 사회의 것으로 남겨 둔 바베트는 자기 자신이 '위대하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며, 그녀는 자신의 기대, 내면의 부름, 즉, '소명'에 충실했으므로 '확신'한다. 바베트의 자기실현은 '동화적'으로 그려졌지만, 연이은 실패-질병과 이혼, 파산-를 버텨낸 디네센의 실제 삶은 그녀가 쓴 이야기보다 훨씬 동화적이다. 그래서일까? 『바베트의 만찬』을 읽으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누군가가 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내가 정한 삶을 손에 쥐고 싶다면, 먼저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손에 쥐었던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였고, 내 것이라고 착각한' 투사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역할과 내가 이미 하나로 얽혀버린 실타래 같은데, 엉킨 한쪽의 끈을 끊어내지 않고 나만 온전이 빠져나온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여겨진다. 어른의 품위를 지키기가 왜 이리도 어려운가... 사회가 던진 투사와 내가 던진 투사, 이 그물망을 언제 다 거두어들이나... 디네센은 "바베트를 보렴~. 그냥 하면 되지 뭘 그리 망설여~!"라고 속삭이며 나의 어깨를 토닥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를 강조한 버지니아 울프 편에 서고 싶다.



p.12,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 존슨. 에코의 서재. 옮긴이의 말 중



고혜경은 융 이론의 대가인 로버트 A 존슨의 저서를 번역하며 옮긴이의 말에 이렇게 적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껴안는 작업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라고-다행이다. 역사적인 과제이니까, 나에게 말미를 조금 더 주어도 될 것 같다-. 나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이들의 행동이 무의식의 투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곧 자기 이해의 ‘필연적 절차’이다. 그래서일까? 둘째를 낳고 기른 시간은 첫째와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수월했다. 좌충우돌하며 다듬어진 나는 이전보다 쉽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모성'이 살짝 부족해 보이는 나를 보며 누군가가 ‘엄마라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투사입니다’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담인데, 당당하게 위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나의 이러한 자신감은 곧 허물어지고 만다. 셋째의 첫 번째 영유아검진에서 의사가 '모유 먹여요?'라고 물을 때 이유 없이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모유를 먹이지 않다니, 모성이 부족하군요로 들렸음! 다시 올라오는 방어심으로 일부러 적건데, 첫째는 12개월, 둘째는 16개월 모유를 먹었습니다-는 아직 내가 그들의 것으로 되돌려주지 못한 투사가 온 사방에 깔려있음을 알게 했다. 의례적인 질문에 당겨진 트리거는 한동안 나의 자존감을 흔들어댔다. '영유아검진'의 백분위 숫자에 지금도 나는 '좋은 엄마'와 '부족한 엄마' 사이를 오간다. 나는 아직 갈길이 멀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범우.



제인 구달과 이사도라 덩컨, 코코 샤넬이 100년 일찍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회가 허락해 주었을까?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야 했던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절절하게 적는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카프카의 마음 공감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나의 아들로 충분하다'라고 이야기했다면, 그는 노년까지 왕성하게 글을 쓰는 작가로-흔히 우리가 성공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했을까?


하지만 『변신』을 읽으며 또 이런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위압적이지 않았다면, 카프카가 병약하지 않아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었다면, 과연 『변신』이란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사회화를 완성하고 개성화의 단계에 올라서는 것이 성공한 어른의 길이며,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그렇게 해낼 수 있다고 믿어온 나의 신념이 왠지 찝찝하다. 41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한 그의 짧은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 차 보이지만 그의 작품은 성공적이다. 카프카는 개성화에 성공한 것인가, 실패한 것인가?


불행해지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회화가 불편한 사람이 있듯이, 개성화를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회화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개성화할 겨를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결국 여기서도 옳고 그름이 모호해진다.


이제는 사회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만이 가치롭다고 여기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개인의 욕구와 기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다. 개인에게 던지는 사회의 투사가 수면 위로 드러나자 사람들은 무턱대고 받아들이던 책임과 의무를 다시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대 열풍, 강남 부동산 불패 신화와 같은 단어들은 과연 개인의 욕구와 기대가 과연 사회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사회에 대한 투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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