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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노운즈 Mar 06. 2024

문학이 마음에 말을 걸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한 어른의 세상



p. 109, 우리가 사는 방식, 시그리드 누네즈. 코쿤북스



손택은 아들 데이비드가 여자친구와 잠든 한밤에 방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할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였다. 그녀의 감정 기복은 자신뿐만 아니라 데이비드의 삶까지 토네이도처럼 혼란으로 빨아들였다. 데이비드는 엄마의 감정이 들떴다가 다시 나락으로 치닫는 변덕 속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그 대가로 엄마가 만들어 준 직장과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소설가이자 예술평론가로 한 시대를 들썩이게 했던 그녀의 이력-난 잘 모르지만, 검색해 보면 아주 대단한 여성임에 분명함-은 그녀의 자기애적 모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지만-우린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관대한 편이니까-, 엄마이자 상담가의 눈으로 바라본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고 위태로우며 가학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나에게 손택은 아들의 삶을 집어삼킨 어머니다. 아들이 없는 손택은 존재불가능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아들에게 의탁했다. 심리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녀는 '잘못된' 부모라고. 그렇지만 누네즈의 회고록을 읽으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데이비드도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평가할까?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옆에 앉은 큰 아들이 핸드폰에 눈을 고정한 채 나의 관심에 무관심으로 응답한다. 섭섭한 나는 "핸드폰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하고, 아들은 "아닌데."라고 대꾸한다. 살짝 냉랭한 기운이 돈다. 이때 나는 좋은 부모인가, 나쁜 부모인가? 초등학교 입학 후 수학 문제집을 풀기 시작한 둘째가 공부하라는 지시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공기가 급속도로 뜨거워진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다음번엔 화낼 거야! 빨리 수학 시작해!" 화를 내겠다고 예고하며 크게 외치듯 말한다. -이게 화가 난 상태인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말로는 화를 아직 내지 않았다고 했지만, 감정은 화로 가득 차있긴 하다.- 이때 나는 좋은 부모인가, 상처 주는 부모인가?


삶은 복잡하다. 어느 한순간의 일화로 우리는 그 삶을 평가할 수 없다. 서로 얽히고설킨 '부모-자녀'란 얼마나 흔한가. 우리는 늘 덩어리진 무리 속에서 살았고,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존중의 역사는 실로 그렇게 길지 않다. 부모로부터 나를 분리하기 위해 아무리 도망쳐도 우리는 결국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 안에 존재한다. 내가 배운 심리학 이론과 상담학 이론들이 과연 정답인 걸까? 아이가 어릴 적 명확했던 '좋은 부모'의 기준이 아이가 자라며 불명확해진다. 큰 아이가 사춘기를 넘기고 내 나이가 중년에 들어서자, 이제는 어린 시절 가둬둔 마음의 상처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에 조금 더 공감되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여성 예술가와 문학가의 삶에 대해 기록한 줄리 필립스의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에서 다시 만난 손택은 어느 순간 나에게 '동지'가 되었다. '엄마'이자 '여성'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의 삶은 나의 인생과 별다르지 않았다.



p. 342,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줄리 필립스. 돌고래.


손택은 스물여섯 살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사회가 내게 맞서 갖고 있는 무기에 필적하기 위해 내겐 무기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X세대로 불리고 '나'로 살라는 응원을 받으며 정말 나만큼은 엄마와 다르게 나만의 인생을 살아냈다 여겼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딸, 여자, 엄마라는 사회가 규정한 바운더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나의 삶'이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작품에 절절하게 매달린 그녀의 인생은 별다르지 않다. 과연 나에게 누군가의 삶을 품평할 자격이 있는가?


그녀의 인생이 보이자 나는 ‘평가자’에서 ‘존재’로 돌아오게 되었다. 긴 인생에서 한 순간을 떼어내고, 그 순간의 행위를 집어내어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평가인가? 타인을 존재로 바라본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 회복을 가져왔다. 나의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고로 나는 나의 인생을 평가할 수 없다. 그저 나는 나의 인생에 존재할 뿐이다.






p. 165, 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녹색광선



이후 문학이 나를 존재로 끌어당기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르주 페렉의 『보통 이하의 것들』에 실린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는 줄거리가 없이 정밀하게 사물을 묘사한다. 만약 내가 그의 인생사에 대해 무엇 하나도 알지 못했다면 그의 글은 고등학생 시절 이상의 시 『오감도』의 제1호-'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로 시작하는-를 접하며 느꼈던 생소함 또는 작은 충격 정도의 크기로 나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4살에 2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6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둔 페렉. 그가 30대 후반에 남긴 이 산문들에 그의 인생이 덧입혀지자 ‘글’이 ‘삶’으로 다가왔다. 그는 왜 ‘이런’ 방식으로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들, 그래서 기억에 남겨지지 않을 것들을 그는 왜 이렇게 소중히 여겼을까?


사람들에게 당연히 여겨져 눈에 띄지 못하고 사라지는 ‘보통 이하의 것들’을 그는 면밀하게 그리고 담담한 어투로 그렸다. 그러나 드러난 문장들 틈사이에 그의 인생을 투과하자 그의 글에서 슬픔과 그리움, 애틋함과 간절함이 읽혔다. ‘수많은 전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부모의 삶은 '수많은' 죽음 사이에선 일상적이지만, '나의 부모'라는 측면에선 울컥하며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치미는 듯한 비탄이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길이가 달라지는 그림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드물다. 찰나에 매달려 영원을 끌어내려는 그의 몸부림에서 부모의 죽음에 깊이 애도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다.


사실 난 페렉을 잘 모르고-편집부의 서문에 나온 그의 삶을 읽은 것이 다이다- 그가 산문들을 통해 남기려는 그의 속마음도 잘 모른다. 그저 나의 추측일 뿐이며, 이 추측은 책의 저자인 페렉이 보기엔 그저 한 독자의 망상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극적인 역사와 역사 속에 기록되지 못한 생명과 죽음. 그리고 개인적인 슬픔이라기엔 일반적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담담하게 채워낸 그의 문장들. 글은 그가 썼지만, 내 마음이 안심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비어버린 공간과 얼어붙은 시간을 용기 내어 마주한 그의 중년이 나에게 "이젠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좋은 어른의 조건이 무엇일까? 에릭슨은 성인기의 발달과업이 ‘생산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생산성은 성숙한 성인이 다음 세대를 구축하고 이끌어가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융은 인생의 중년엔 자기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개성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생산성'과 '개성화'. 타인과 사회를 위해 영향력을 뻗는 생산성과 무의식 저 깊은 곳에 가려진 진짜 나를 만나는 개성화는 교차점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p.108, 엄마실격, 샬럿 퍼킨스 길먼. 민음사.



샬럿 퍼킨스 길먼은 『엄마실격』에서 자신의 삶에선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언젠간 실현되기를 바라는 이상의 세계를 소설로 구현한다. 1800년대 중반에 태어난 그녀는 여성의 글쓰기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받쳐 '자기실현'을 이루어 낸다. <발상의 전환>에서 남편 몰래 위층 집을 빌려 시어머니와 '어린이집'을 차린 줄리아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시대에 길먼이 어떻게 '공동육아'의 개념을 구체화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지 못해 우울한 그녀에게 우울감에서 벗어나려면 글을 읽거나 쓰지 말아야 한다는 처방이 옳으니 따르라며 강요하는 자들-의사, 남편을 비롯하여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 모두- 속에서 어떻게 그녀는 이리도 유쾌하고 통쾌한 글을 써내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생산성과 개성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결과물이지 않을까?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 누구나 그러하듯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그녀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후 이혼하고 소설가이자 사회학자로 살아간 그녀의 인생은 자기를 오롯이 실현해 낸 '개성화'의 삶이다.


20대에 배운 심리학은 이상적인 삶과 건강한 인간의 '표상'을 공고히 해주었다. 하지만 40대에 다시 만난 심리학은 결국 나에게 되묻는다. 어느 방향으로 생산성을 뻗을지, 얼마나 깊이 개성화를 이룰지 그 답을 '자신만이 구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며. 과연 나도 길먼처럼 인생의 숙제를 나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


 




융의 '개성화'는 영적이며 직관적인 이론이지만, 융의 이론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 현실적이고 생산적이다. 에릭슨의 '생산성'은 사회를 향해 있지만, 우리는 생산성의 미션에 도전하기 이전에 정체감 형성의 미션을 완료해야 하고, 정체감 형성은 자기 이해에서 비롯된다. 결국 ‘좋은 어른’이 되려면 ‘멀리 영향력을 펼쳐라’라는 에릭슨의 조언도 맞고, ‘내 안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라’는 융의 조언도 맞다. 어른이란 깊어짐과 나아감을 동시에 이루어 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함과 미래를 창조함을 현재에 동시에 가능하게 해야 한다.


역할이 늘어날수록 선택할 것이 많아지고, 지식이 불어날수록 불안도 높아진다. 그리고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이때 문학은 우리에게 슬쩍 힌트를 던져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현재의 선택이 가져올 미래를 보여준다. 문학에 등장한 인물들 속에서 나는 나의 부분들을 발견한다. 인물들의 서사는 나의 뭉뚱그려진 삶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돕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즈음엔 내가 나아갈 방향에 조언을 얻기도 한다. 중년이 되어 만난 문학은 삶에서의 소명과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가득하다. 나는 또다시 독서를 통해 나의 원형을 성장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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