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가 이룬 아름다운 흔적에 대하여
크로스비의 해안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인 『올리브 키터리지』는 총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만 70명이 넘는다. 읽다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 나오면 앞장을 다시 뒤적거리게 되는데, 이 이야기에 나온 ‘그’가 저 이야기에 그려진 ‘그’였다는 사실에 놀라며 동시에 ‘그’를 더 잘 알게 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몇 개의 장일지, 등장인물은 얼마나 될지 풀어본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과 한 때에 꼭 필요했던 인물들을 꼽아본다. 성기게 세어도 순식간에 50여 명을 넘긴다. 순간 궁금해진다. 나는 몇 사람의 소설에 등장했을까?
어느 에피소드의 올리브는 '성녀'이고, 어느 에피소드의 올리브는 '노망 난 할망구'이며, 어느 에피소드의 올리브는 '무뚝뚝함의 결정체'이고, 어느 에피소드의 올리브는 '사랑'에 흔들린다. 비호감 꼰대였던 올리브의 첫인상이 책장을 넘길수록 균열된다. 에피소드가 쌓아 올려질수록 올리브의 결점에 너그러워지고, 어느 순간 작가에게 홀린 기분이 든다. '거봐! 반할 줄 알았어!' 작가 작정했으니 어쩔 수 없이 난 또 '금사빠'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의문이 따라온다. 진짜 올리브는 누구인가?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 나는 어떤 인물로 그려질까?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닮았을까, 내가 보이려고 애쓴 모습과 닮았을까.
대체로 인간은 모순투성이이다. 어우러지지 않는 성격들이 과자 종합선물세트처럼 커다란 박스에 담겨있다. 나만해도 참 극단적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친구들의 초대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게으른데 열정적이며, 수줍음을 타는 편이면서도 직업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강사다. 20대에는 이런 나의 모순들이 부모탓 같았고, 30대에는 이 모순들이 밖으로 삐져나가지 않도록 숨기는 데 다급했다. 이런 노력도 무색하게 40대 중반이 지난 지금은 이 모순들이 감출 틈도 없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괴팍해지는 이유는 더 이상 특이함을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이하다고 해서 가혹한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해리스의 말이 맞다. 역시 그녀에겐 배울 점이 많다!
심리학자들은 이 내면의 모순을 감추는 수문장을 '자아(ego)'라고 부른다. 프로이트는 저술에서 ‘자기’를 ‘나(ich)’라는 용어로 사용했는데, 이때 ‘나(ich)’는 정신을 의미하는 ‘자아(ego)’와 전인으로서의 ‘자기(self)’,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었다. 키르케고르가 자아를 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자아', 성취와 미래를 꿈꾸는 '이상적인 자아',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상기시키는 '진정한 자아'로 나누던 시절만 하더라도 자아와 자기는 철학자나 정신분석학자의 사고 속에서 크게 변별력이 없었던 것 같다.
이후 하르트만, 코헛, 클라인, 융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깊은 연구를 통해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기’는 자신의 본질이자 전인의 독특하고 개인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용어로 구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융의 자전적 회고록인 『기억, 꿈, 사상』의 역자인 조성기는 <옮긴이의 서문>에서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언어와 융의 심리적 언어는 ‘자기’를 규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해와 행동화의 거리가 멀듯, 자기와 닿아지지 않는 실현은 아는 채하는 우리를 코웃음 치며 바라보는 것 같다.
다만 문학의 언어는 다르다. 소설 구성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은 한 인물을 묘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있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들과 함께하기를 선택한 『다섯째 아이』의 헤리엇, 불안과 두려움을 버티며 선을 행할 용기를 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 감정의 충동이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 반대로 안정적인 삶과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시하는 니나의 언니 마르게리타, 물아일체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싯다르타』의 고타마, 나이 듦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는 올리브.
소설에서 만난 이들은 나의 한 부분이기도 하고, 내가 만나는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철학이 보편적이고, 심리학이 이상적이라면, 문학은 인간적이고 개별적으로 ‘자기’를 탐구한다. 그러나 자기실현에 시간성을 품은 것은 문학뿐이다. 철학과 심리학이 보여주는 자기는 명료하지만 어느 한 상태만을 그려낸다. 그래서일까? 자기실현의 목적지를 명확히 해준 철학과 심리학은 이성적으로 나를 깨워냈지만, 자기실현의 온전한 이해와 용기는 문학을 통해 얻었다. 자기를 외면하는 순간과 재회하는 순간, 자기를 놓치는 순간과 움켜쥐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건 문학뿐이었다. 또한 문학은 자기실현의 성공과 실패가 때론 신의 심술-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의미로-로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애쓰며 허덕이는 중엔 이룬 자만큼이나 이루려 애쓰는 자도 좋은 스승이지 않을까?
나의 '자기'가 온전히 드러난 순간들을 모아 본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국문학과에 갔고, 엄마는 내가 국어 선생님이 되길 바랐다. 탐구하길 좋아하는 성향 탓에 국문학자를 꿈꿨는데, 교직 이수 수업에서 교육 심리학을 만나고 심리학에 빠져들며 상담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교육 상담 기업에 취직하고, 박사학위에 도전하고, 나의 상담 경험을 책으로 쓰겠다고 용기 낸 날들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반면, 명예나 부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거나, 학군지에서 멀어지는 집-원래도 그렇게 교육열이 높은 동네는 아니었지만-으로 이사하겠다고 결심한 날은 흐름을 역행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먹기가 녹록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딛고 있던 사회적 기반을 걷어차기로 마음먹은 순간만큼 나의 '자기'가 큰 목소리를 낸 때는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명징하게 알 수 있는 날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으로 화가의 꿈을 키우기 어려웠던 앨리스 닐은 타이피스트로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 이렇게 산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아놓은 돈으로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학교에 지원한다. 닐의 주변 사람들은 순행하는 삶을 거스르는 그녀를 비웃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궁금하다. 그녀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온 삶을 두고 파리로 떠나는 순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던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마음과 별다르지 않았을까?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확신한다. 우리의 자기(Self)는 흘러가는 대로 갈 때보다 흐름을 역행할 때 더욱 드러난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후반부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브뤼노 선장이다. 그는 스트릭랜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 경우만 보자면 그 사람에게 공감을 느낀 게 별로 이상할 건 없어요. 우린 서로 모르고 있긴 했겠지만, 결국 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었으니까요." 해군에서 복무하며 번 돈을 단번에 잃고 아내와 타히티의 한 무인도에 들어가 섬을 꾸미며 자식을 낳아 기른 브뤼노 선장-물론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부랑자처럼 살아가는 스트릭랜드의 그 무엇과 '같다'는 말인가! 의아한 마음에 눈이 글을 읽어 내려가는 속도조차도 견딜 수 없이 조급해져 빠르게 책을 훑고-살짝 안정을 찾은 후-, 다시 앞으로 돌아와 찬찬히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고 들어간 섬에서 브뤼노 선장은 온종일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야자수를 심고, 머물 집을 짓는다. 그 사이 태어난 아들과 딸에게 아내는 피아노와 영어를 가르치고, 브뤼노 선장은 라틴어와 수학을 가르치며, 함께 역사책을 읽는다. 성실하여 인내할 수 있었고, 소박함 덕에 부족함이 없는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나 섬은 '아름다운 동산'이 되었고, 선장의 아이들은 '배를 부릴 줄도 알'만큼 자랐다. 그는 아무것도 없던 섬을 아름다움으로 채웠다. 브뤼노 선장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 친구를 움직인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친구가 그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나는 인생으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아이를 낳은 순간을 떠올린다. 여지없이 심장 근처가 온기로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아이가 나의 몸에서 개인으로 분리되고, 첫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안겨지는 순간은 세 번 모두 낯설고 다름없이 신비로웠다.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기분이 되살아난다. 다이빙대 위에 선 큰 아들의 힘 있는 몸이 그간의 노력을 드러내며 아름답다. 수학은 하기 싫으니 제일 먼저 해야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기특해하는 둘째 아들의 환한 눈매가 아름답다-종종 그러면 좋겠다. '어른이 도와줘야겠는데?'라며 음료수 병을 열어달라고 오는 막내의 당당한 눈빛이 아름답다. 놀던 장난감과 굴러다니는 책이 거슬리지만 내 고민과 선택이 온전히 실현된 전반적으로 단정한 이 집도 흡족하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나른한 주말 오후라 마음이 너그럽다. 내 인생의 아름다움은 '달' 덕분일까, '6펜스' 덕분일까? 난 여전히 달을 좇고, 6펜스에 의지한다. 오늘의 여유는 아등바등 지낸 과거의 어느 날에 빚을 지고 있고, 소박한 미래에 만족하는 나의 평범함 덕이다. 그림 외엔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스트릭랜드는 투박한 개성으로 화가라는 자기실현을 이루었다. 원만한 개성의 브뤼노 선장은 조화로운 삶이라는 자기실현을 이루었다.
‘달’만 좇다가는 자아팽창의 성격과 의존적인 성취를 하게 될 것이고, 6펜스만 챙기다간 자기기만의 성격과 물질적 성취에 얽혀들 것이다. 나는 아마도 어느 날은 달을 탐하고, 어느 날은 6펜스를 욕망하겠지만 곧 나의 평온을 다시 찾기를 기대한다. 브뤼노 선장처럼 나도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났음이 분명하다. 삶에 주어진 것들이 늘 조화롭길, 그리고 그 조화로 인한 아름다움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브뤼노 선장은 스트릭랜드와 같은 것을 지향하니 나도 스트릭랜드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결국 달만 좇든, 6펜스만 탐하든, 그 둘의 조화를 찾든 모두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기실현이란 하나의 개념에서 만들어진 여러 모습일 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