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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마음

by 김혜정


작은 골목에서 우회전을 했다.

불과 50미터 앞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종이박스를 가득 실은 리어카였다. 차선을 한 칸 왼쪽으로 바꾸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차곡차곡 쌓아 올린 종이박스 키보다 작은, 아주 작은 할머니가 보였다. 힘을 쓰기 위해 일부러 굽힌 것이 아닌, 오래전에 굽어져 버린 듯한 등허리가 둥글게 곱아 있었다. 수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3차선 하나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작은 키와 그 잰걸음은 무척 슬퍼 보였다.


그러나 그 슬픔도 잠시, 큰 도로로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 할머니의 앞쪽을 가로질러 버렸다. 곧바로 우회전을 하느라 뒤로 제껴진 할머니를 룸미러로 확인도 못 했다. 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가 애잔해 보인 건 리어카를 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다지도 작디작아진 키나 굽은 등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에게 다가온 슬픔은 그 느릿느릿한 속도 때문에 누군가 내쏘았을지 모를 비난을 미리 걱정하는 데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십중팔구) 할머니를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르니까. 이 바쁜 도로에서 왜 길을 막고 있느냐고 속으로 고성을 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엔 도로에서 리어카를 끄는 노인분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이 생각났다. 속으로 '인도로 다니면 운전자에게 피해는 없을 거 아니냐'고 생각했던 사람었는데, 바로 나였다. 예전에 원칙주의 사고형이었던 나는 교통수단이 아닌 리어카를 도로 한복판에서 끄는 행위는 교통 안전에도 방해가 되고 운전자도 위험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것이 보였다. 다르게 느껴졌다. 종이박스를 높이 쌓아 올리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할머니는 운전자를 방해하고 교통의 흐름을 끊으려고 도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모아둔 종이박스 하나하나 행여 쏟아질까, 온 마음을 집중하여 수레를 끌고 목적지까지 가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뿐이었다. 급할 건 없었다. 바쁜 것도 없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으로 가느라 종이박스를 쏟아지게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매 할머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경험에서 우러난 자기 확신이 있었다.


내가 느꼈던 짧은 슬픔은 내가 과거에 빚었던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의 발로였다. 누군가 과거의 나처럼 할머니를 책망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 다른 사람도 그러지 않겠는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


그러나 다행히도 할머니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뭔가 단단해 보이고 고와 보이는 할머니는 그렇게 유유하게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종이박스를 나르는 키 작은 할머니를 봐서인지, 그 걸음에 성화나 불평이나 욕심 따위가 묻어있지 않아 보여서인지, 내가 어른이 되는 중이라 인애로운 마음이 커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할머니의 수레와 작은 걸음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삶이 있고 방향이 있고 속도가 있다는 것.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아야 할, 각자의 고유한 삶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러면 그 고유의 삶은 슬픔이 아닌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되고 연민하지 않아도 되는 지극히 평범하고 검소한 삶인 것이다.


리어카를 끌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는 그 할머니에게서 발견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나 역시도 '나의 소중한 삶' 뿐 아니라 '타인의 소중한 삶'도 아끼는 마음을 갖고 살가고 싶다.


요즘 흉흉한 (살인 예고)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안 그래도 찜통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데 자기만을 알아달라고 보채고 과시욕을 내고 찜통 기승을 부리는 사람이 많아질까 두렵다. 그런 텁텁한 마음을 할머니에 대한 고운 시선으로 털어내 본다.



(대문 그림 출처 : 블로그 w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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