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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밥 꼭 먹고 가

by 김혜정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뭐라도 먹을 걸 준비해야 하는데 기진맥진해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퇴근하면서 먹을 걸 사 와야 하는 것도 나의 루틴이거늘 그마저도 하기가 싫었다. 하기 싫으니 어쩔 수 없다. 패스다.


작은아들을 태우고 집에 도착하니 배가 고팠다. 나보다 더 배고팠던 작은아들은 어젯밤 먹다 남은 블랙올리오 치킨 세 조각을 게 눈 감추듯 입 속에서 위장으로 탈출시켰고 나는 하나 남은 봉지 라면을 내 거라고 두 아들에게 선포한 후10년 된 노랗고 귀여운 양은 냄비에다 팔팔 끓여 가지고 와 식탁에 앉았다.


아직 배고픈 작은아들은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옆을 서성이며 "아~~~ 엄마, 라면 더 없지!! 라면, 아~~~!!" 하며 제일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연거푸 탄식했다.

"작은아들!! 그럼 엄마랑 번갈아 가면서 먹을까?"

"와 진짜!! 그래도 돼? 고마워, 엄마. 사랑해~!!"

사랑이 넘치는 작은아들은 그렇게 배가 차지도 않을 만큼의 라면 반 개를 먹고는 흡족해했고 기분 좋은 나도 흡족하리만큼 배가 불렀으므로 이상으로 집안일은 안중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곧 남편이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은 집안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가끔씩 알아서 설거지도 하고 밥도 하는 사람인데 반찬이 없고 설거지까지 잔뜩 쌓여 있는 오늘 같은 날 ㅡ 오늘은 오전부터 요양원에 계시는 90대 집사님 심방을 다녀와서 바빴다 ㅡ은 남편의 퇴근 시간이 부담스러워진다. 침대에 누워 뒹글뒹글 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어디야?"

"어~ 여기 고속버스터미널이야~!"

"고속버스터미널이 어디야?

오늘 버스 안 가지고 갔어?"

(헉~~~!!! 뭔소리!!! ㅋㅋㅋㅋㅋ

내 입에서 나온 소린데 입이 고장났나!! 웬 버스~ㅋㅋ

버스를 가져가?ㅋㅋ 지하 주차장에 버스가 있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ㅋㅋ 나는 피곤한 나에게 이렇게 웃음을 선사하고 또 스스로 흡족해했다. 남편도 깔깔 웃었다. 웃었으니 됐어!! 나 지금 피곤한 여자야~!!)


어이를 상실케 할 농후한 피로감과 고장 난 뇌의 콜라보로 인하여, 1시간 정도는 더 걸릴 거라는 남편의 대답을 귓등으로 흘리며 1시간의 자유를 좀 더 만끽하기로 했다. 《걷는 사람, 하정우》를 조금 읽어야지 하고 침대에 엎드린 나는 곧바로 폰으로 브런치를 열고 수업이 끝난 후에 쓰다 만 글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역시 뇌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진 않았다. 뇌는 브런치를 하정우보다 더 좋아한다.


시계는 약속된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시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시계를 신경 쓰지 않은 만큼 남편에게도 신경 써 주지 못했고 어느새 들어와 있는 남편은 나에게 인사하고 알아서 늦은 저녁밥을 해결하고 있었다. 브런치를 보고 있는 시간 동안 나의 독립성과 읽고 쓸 자유는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말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친 자유는 방종이 되는 까닭에 미안한 마음으로 잠시나마 식탁에 같이 앉아 남편의 식사에 동참해 주었다. 변한 반찬이 없었지만 워낙 착한 남편은 어느 것 하나 잔소리하거나 꼬투리 잡는 법이 없었다.


미안함은 다 태우지 못한 한 줌의 재처럼 마음속에 침전하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안일은 못하리라.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집안일에 대한 의무감을 눙치면서 나는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흡족함을 홀로 누리고 말았다. 남편은 토요일 아침 이른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고 나는 《걷는 사람, 하정우》를 들고 작은아들 방으로 향하였다. 남편의 숙면을 위하여 아이들도 볼륨을 최대한 낮춰 쇼미더머니를 보고 있었다.


전기매트를 켜고 엎드렸다. 하정우보다 브런치를 좋아하는 뇌는 자동반사로 다시 브런치에 접속하게 했고 뜨끈해진 몸은 하루의 노고를 풀며 점점 퍼져가고 있었다. 쇼미가 끝났는지 잠든 나에게 작은아들은 이제 엄마 방으로 가서 자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지만 나는 옆으로 비껴 난 채 두 시간을 더 자다가 한기를 느끼고 깨어났다.


새벽 3시 반이었다. 뭉개 놓은 집안일을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조용조용 흑미밥을 안치고 최대한 달그락거리지 않게 도둑 설거지를 했다. 김치를 꺼내 싹둑싹둑 잘라 꼭꼭 물기를 빼고 물을 담은 냄비에 불을 붙이고 참치캔과 스팸을 꺼내 재료를 준비했다.


김치찌개가 끓고 있는 사이 계란 3개를 탁 터트려 빙글빙글 휘저어 소금을 톡톡 넣고 달궈진 프라이팬에 촤라락 둥글게 펼쳤다가 둘둘 말아 계란말이를 후딱 만들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메뉴였다. 아무튼 2가지 메뉴가 준비되었다. 새벽에 내 무거운 짐을 벗고 흡족함 게이지를 올린 기념으로 사진을 찰칵 찍었다.


이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얼른 침대로 들어가 숙면을 취해야 하는데 다시 뇌의 조종을 받은 나는 브런치를 열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 얼른 잠들어서 남편이 식탁을 보고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데.. 실패다.

남편이 일어나서 씻는 소리가 들린다. ㅜㅜ

설상가상 내 폰 밧데리는 5%만을 남긴 채 할딱거리고 있다.

급해진다. 이 글을 얼른 마무리하고 일어나자, 하는데


방문을 열고 나온 남편이, 퀭한 눈으로 씽크대 앞에 앉아 폰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6시다.

"헐~ 여태까지 안 잔 거야?"

"아니. 아까 2시간 잤어."

"그럼 뭐했어~"

"나 밥하고 반찬했지!!"

"에구. 얼른 들어가서 자~~."


토요일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내리 수업하는 남편. 출근길도 막히거니와 차를 가져가서 밖에 하루종일 세워두면 밤에는 차가 언다고 대중교통을 타고 가느라 딴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것 같다. 토요일은 더 잘 먹고 가야 하는데 게으른 와이프 때문에 오히려 아침밥도 못 먹고 갈까 봐, 몸 축날까 봐 나이가 들수록 걱정도 커진다.

그러니까, 자기야, 아침엔 따뜻한 밥 꼭 먹고 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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