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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바람나겠어

누구랑?

by 김혜정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이 쉬는 날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어떤 날은 돈까스, 어떤 날은 한정식, 어떤 날은 파스타, 어떤 날은 만둣국. 주로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메뉴로 내가 정한다.


남편이 쉬는 금요일이었다. 피부에 생긴 잡티 제거 리터치를 받고 나왔더니 날씨가 우울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비가 오니까 국물이 땡겨. 갑자기 베트남 쌀국수가 먹고 싶네? 자기야, 베트남 쌀국수 어때? 남편은 어김없는 나의 답정너에 어, 좋아!! 10분 있다가 내려가면 되지? 한다. 어~ 내가 어디루 갈지 검색해 볼게. 신호 대기 중에 가까운 동네에 있는 쌀국숫집을 초이스. 간판과 내부 인테리어, 댓글 호평까지 스캔 완료.


기대했던 것보다 모든 것이 훌륭했다. 현지보다 더 깔끔한 해물 쌀국수의 시원 컬컬한 육수!! 바스락, 과자처럼 부서지는 새우튀김 전분칩!! 둘 이상은 앉을 수 없는 아주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그릇의 쌀국수와 아주 작은 새우튀김 접시 하나, 열다섯 명 정도밖에 수용하지 못할 작은 공간에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젊은 청년들. 왁자하지 않게 공기를 휘젓는 소란함, 웃음, 크고 작은 눈망울들. 베트남이 아니어도 좋았고 호사스럽지 않아도 좋았다. 단란함이 선사하는 따뜻함이 좋았고 젊은 청춘이 수놓는 화사한 공기가 좋았다. 내가 나이가 든 건지는 몰라도 젊은 청춘들을 보면 너무 즐겁다. 나도 덩달아 젊어진 느낌이어서. 아마 그 식당에 남편과 나 둘만 있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즐거움인지도 몰랐다. 집에서 배달해서 먹는 게 좋다고? 난 아니다. 나는 새로운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좋다. 기억에도 남지 않을 잠시 스쳐가는 사람이지만 모르는 사람들 속에 묻혀 있는 나를 만나는 게 좋다. 왜일까?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지만 난 군중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래서 사람이 북적이는 북카페를 혼자 가는 것도 좋고 모르는 사람들과 한마음 되어 같은 같은 작품을 감상하는 극장도 좋은가 보다.


쌀국수를 수다에 말아먹고 있는 동안 지나가던 비는 이미 다른 동네로 가버리고 없었다. 우리는 돌아온 맑은 날씨가 벌어준 시간을 쓰러 근린공원으로 가서 40~50분을 걸었다. 주로 나는 말하고 남편은 들어준다. 듣기만 하지 말고 자기 얘기도 좀 하라고 나는 매번 말하지만 연애할 때 남편이 나보다 말을 더 많이 했다면 exactly 난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다. 들어주는 게 좋아서 결혼했으면서 이제는 듣기만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나란 사람!! 남편이 나만큼 따지는 성격이었다면 아마 이 점을 근거로 따졌을 텐데. ㅋㅋ. 순진하고 단순한 남편은 여태까지 이 생각은 못 한 것 같다. 매번 당하는 걸 보면.



뙤약볕을 손으로 가리며 인공수로 옆을 남편과 나란히 지나고 있는데 중년 남녀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둘이는 꼭 붙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수다를 떨며 걷고 있었고 남자도 얼굴이 싱글벙글, 아주 좋아 죽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부 같지는 않았다.


남편이 소곤소곤 말했다.

“혹시 불륜?”

“백퍼 불륜이지.”

“왜? 어떻게 알어?”

“누가 저렇게 호들갑스럽게 웃음면서 꼭 붙어서 걸어 다녀~. 부부가.”

“왜? 부부는 저렇게 안 되나?”

“애 키우고 몇 년만 지나면 있던 감정 다 없어지지. 시댁이랑 문제 있어 봐. 그럼 완전 삭막해지는 거고. 저렇게 좋아죽는 건 사귈 때나 가능한 거야.”

“그런가?”

“어느 글인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은 누구나 계속 연애를 하고 싶어한대.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나서 배우자랑 감정이 식으면 새로운 연애 대상을 찾는 거고, 그래서 중년 이후에 바람을 많이 피우게 되는 거라고.”

“그래?”

“어. 나는 나만 그런 건가 싶었는데 글인가 책에서 누가 그런 얘길 하니까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가 됐어. 나는 연애하고 싶거든.”

“어어어... 그래? 그럼 어떻게 하지?” (살짝 당황)

“뭘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내가 바람피울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책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에 공감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신선한 느낌 받으려고 하는 거지.”

“어어어... 그래. 그럼 내가 잘해야 되겠네...”


남편이 극구 부인해 왔던, 회피형 인간임을 진심으로 인정한 이후 우리 부부의 대화는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한 적은 없지만 남편의 방어적인 발언,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답이 점차 줄어들고 최근 매일 하고 있는 산책에도 힘을 받으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은 칼로 물 베기라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남편이 형식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진심으로 마음의 바닥까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해서 내 마음도 활짝 열렸다.


어젯밤의 산들바람도 어찌나 마음을 살랑거리게 하는지 옆단지를 산책하다가 남편을 꼬시고 말았다. 운동 기구를 하고서 다시 걷는데 남편이 물었다.

“가디건 주머니에다 손은 왜 넣고 있는 거야?”

남편은 이왕 걸을 때 양팔을 앞뒤로 크게 휘저으면서 걸으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는 걸 심리에 빠삭한 나는 순간적으로 알아챘지만,

“왜? 손 잡고 걷고 싶어?” 하면서,

남편의 투박한 왼손으로 내 작은 오른손을 쏙 집어넣었다.

“ㅋㅋㅋㅋㅋㅋ.”

남편은 귀여워하면서 내 손을 꼭 잡고 싱글벙글해졌다.



날씨가 모든 걸 주도했기에, 난 여세를 몰아서 남편에게 맥주집에 가자고 제안했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지 3년이 넘었고 2년 전쯤 외관이 무척 화려한 <금별맥주>가 단지에 떡 하니 생겼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둘이 맥주집에 가본 지도 몇 해가 지났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생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니 기분이 새로웠다. 새로운 공간, 스쳐 지나가는 군중 속의 나를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지난 얘기, 학원 얘기, 소소한 얘기, 가벼운 농담도 집에서보다 훨씬 즐거웠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서인지, 술에 취해서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나는 어느샌가 팔짱을 끼고 엉겨 붙어 있었다. 그저께 낮에 봤던 그 중년의 남녀 커플의 모습이었다.


애 낳고 독박육아하고 일하고 감정소모하며 19년을 살았지만 힘들었던 시간은 곱게 접어서 슬며시 편집할 시간인 것 같다. 김대식 뇌과학 박사가 말했듯이, 내 인생에 해로운 기억은 싹둑 잘라서 편집!!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용기를 내 보기로 해서 그런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내 인생의 주인은 변함없이 나 자신이고 사그라들었던 연애의 감정을 다시 지필 수 있는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다. 다만 중요한 건 방향.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듯이, 연애도 방향(대상)이 중요하다. 내가 손잡지 않으면 먼저 손잡자고도 못하는 눈치보이(BOY) 남편이지만, 언제든 내가 먼저 손 내밀면 껄껄껄 하며 좋아죽을 남편이기에 그래, 너로 정했다. 내 새로운 연애의 대상! 바로 너야.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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