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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그리고 <영향에 대한 불안>

by 김혜정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정독하지는 못하였지만 인간 고유의 불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어 글을 쓴다.


‘불안’의 배경

물질적 진보가 이룩한 경제적 불평등


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서양 문명의 지난 2000년의 역사 속에서 18세기 이후 엄청난 속도로 물질적 진보가 일어났다. 중세 유럽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고 식량뿐 아니라 과학 지식과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도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이 책 p.41 <물질적 진보>에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된다.


1959년 7월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미국의 기술과 물질적 성취를 전시하는 박람회를 개최하러 모스크바로 갔다. 이 박람회 전시장에서는 미국의 보통 노동자의 가정을 본래의 크기 그대로 복제해 놓았는데 이곳의 바닥에는 카펫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고, 중앙난방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으며, 부엌에는 세탁기와 회전식 건조기와 냉장고도 있었다.


닉슨이 니키타 흐루시초프를 맞이하여 전시장을 안내하자, 견본 가정의 부엌에서 전기 레몬 압착기를 발견한 흐루시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런 ‘쓸데없는 도구’를 갖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닉슨이 대꾸했다.


“여자의 일을 덜어주는 것은 무엇이든 유용하지요.”


“우리는 여성을 일꾼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소. 당신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러는지 몰라도.”


성난 흐루시초프는 이렇게 쏘아붙이며 나지막이 이렇게 덧붙였다.


“가서 니 할미하고나 붙어먹어라!!”




이를 일반화시켜 보자면-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 서면 알량한 자존심이 건드려지면서 불편과 모욕을 느낀다. 루시초프가 닉슨 앞에서 성난 꼬마가 된 것처럼 말이다.


반면 물질적 부를 소유한 사람 자신의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세상적 편리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그 능력에 권력이 더하여지면서 남들 앞에서 뽐내고 우쭐 댈 수 있게 된다. 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 선망의 대상이 되 때문이다.


당시 빈곤과 궁핍에 휩싸였던 러시아 국민들은 미국의 견본 가정을 TV로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불안’의 원인


1) 타인과의 비교 의식 & 내면의 두려움 (자기비판)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갈망을 느끼기도 하고 왠지 모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불안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바로 자기 내면에 있는 두려움에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 갖고자 하는 것, 즉 자신의 열망에 대한 자기 판단이 긍정이나 확신을 지니지 않고 있을 때 불안이 생긴다. 그리고 그 긍정심이나 확실성이 부족할수록, 혹은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고 싶어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2) 미래의 불확실성


우리의 불안이 어느 시점에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 불안을 느끼지만 근본적인 불안의 원인은 미래에 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얻어낼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하면? 나는? 내 가족은? 사회적인 시선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자신을 공격하고 그 불확실성이 머릿속 공간을 헤집고 들어오면 저절로 두려움이 생기고 불안에 압도당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정서가 발동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3) 부에 대한 선망과 갈증 & 존경에의 욕구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1759)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p.17~18)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타인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관심을 획득하는 것이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가?


알랭 드 보통은 p.306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삶, 우여곡절 없이 평탄한 삶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평범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평생을 산다는 것이고 그건 참으로 지루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나답게, 나다움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야망이 들끓어 오른다. 다른 삶과 차별화된 삶, 평범한 것보다 좀 더 고귀한 삶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정된 자아상을 먼저 건축하고 그 건축물 안을 좀 더 가치 있고 빛나는 보석들로 장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재능과 운과 경제력은 현실적으로 그것들을 다 갖추기에 부족하다. 부족한 현실 때문에 괴로운 거고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불안’의 쓸모와 해법

ㅡ 미래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자기 열망


p.150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 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 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 보라는 것이다.


p.138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것처럼, 불안은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치부할 때 찾아온다. 자기 자신을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 판단하면 아무리 남들이 자신을 인정한다 해도 자기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불안에 대해서도 미리 벌벌 떨 필요 없다. 불안이 엄습하여 마음의 빈틈을 쑤시고 들어온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히려 불안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개인적 성취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은 긍정의 대상이다. 불안은 미래를 더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자기 열망의 다른 이름.


불안의 요소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 단 10초 만에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없던 불안을 찾아내려고 10초를 쓰기보다는 있는 불안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줄까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데 쓰는 것이 더 좋다. 우리에겐 앞으로 남은 여생이 계속 불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대치나 요구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가꾸는 데 시간을 들이자. 불안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정원을 가꾸다 보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실제의 불안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한 가지 실천해 볼 것은 알랭드 보통이 말해 준 치유책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모험과 탐색, 문학 작품을 통한 세계 여행!!



예술가들의 ‘불안’이란 ㅡ <알쓸인잡> 중


BTS의 RM이 말하길, 자신은 하고 싶은 음악을 만들고 대중들과 소통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둘러보니 대중들의 마이너리티를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자기가 의도했던 바도 아니었고 그런 지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원인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RM의 말을 듣자마자 김영하 작가는 전 예일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해럴드 블룸이 제시한 예술가가 느끼는 ‘영향에 대한 불안’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었다.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어떻게 예술가가 되는가? ‘영향에 대한 불안’을 가짐으로써 예술가가 된다.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에게 너무 강력한 영향을 받아서 자신이 아류가 될까 봐 저항하게 되지만 그 저항은 예술가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예술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향에 대한 불안’은 다른 데 또 있다. 바로 대중이 끼치는 영향이다. 예술가는 대중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는 대중들에 대하여 자의식을 갖고 불안을 느껴야만 한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예술가에게 투사하고 예술가는 거기에 투항하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어갈 때 대중들과 예술가의 요구가 맞물리면서 새로운 ‘나’를 찾게 되는 것이다.


영향에 대한 불안

많은 독자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라면 아마 이 '영향에 대한 불안'을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본다. 자신이 내뱉는 한 마디가 매스컴에 오르고 부풀려지고 재해석되는 경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위치일까. 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건 불변의 진리인 만큼 자기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다른 작가를 흠모하거나 앙망하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짜릿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심리적 불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영향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것!! 이것이 있는 자가 진정한 예술가일 터이니,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설이 만건곤 할 제 그 불안 안에서 독야청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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