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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최초의 기억

1부. 나의 유년 시절

by 김혜정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이 박힌 기억이 있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고 일컫는 그 기억은 평생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을 굴러 다니다가 그것과 연관된 감정이 용솟음칠 때 불현듯 떠오른다.

나에게 그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다.


나는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우리 집 골목보다 훨씬 넓은 길, 어딘가 동네 어귀쯤 되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걷다 보니 집이 보였다. 집 앞에 계단이 2개 놓여 있는 집, 우리 집이었다.


'드디어 집에 왔네! 근데 우리 집 계단이 이렇게 높았나?'


나는 자그마한 발을 들어 올려 힘차게 올라갔다. 대문이 열려 있었고 널따란 마당이 나왔다.


"엄마아~~!!"


엄마가 대답을 안 했다. 다시 불러 보자.


"엄. 마아아아아아아!"


엄마가 안에 있다가 툇마루로 나와 디딤돌 위에 놓인 신발을 신고 나에게 다가왔다.


어! 근데 우리 엄마가 아니잖아!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앞에 선 건 낯선 아줌마였다. 처음 보는 아줌마가 나를 보 깜짝 놀라고 있었다.


"아니, 아가, 어디를 찾아온 거야? 엄마 어딨어, 엄마."


얼굴 모를 아줌마를 보고 뿌아앙~ 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어딨어."라는 말에 엄마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아줌마는 쭈그려 앉아서 나를 안아 주고, 재차 물었다.


"집이 어디야. 엄마 찾아줄게."


내가 집이 어딘지 알았으면 그 집엘 갔겠나? 지금 생각하니 참 대책 없는 아줌마네. 아줌마는 나보다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으엉으엉 울면서 말했다. 입에서 침이 지이익 하고 떨어졌다.

"모올라여어어어. ㅠㅠ."


몇 분을 서서 울었을까. 그 아줌마가 나를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던 사이,

등 뒤에서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얘가 어딜 갔나 했더니! 언제 여기로 왔데에~! 아이고오."

"그 댁 애기에요?"

"네. 우리 딸이에요. 아이고, 갑자기 애가 안 보여서."

"에그. 어쩌다 애가 바깥에 나와서 혼자 돌아댕겼데요~?"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엄마 손을 붙들었다. 이게 내 엄마였다.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찾았다. 내가 호기심에 집을 나가 사방을 싸돌아댕겼어도 나를 기어이 찾아내는 기똥찬 엄마였다. 엄마란 존재는 그렇게 위대했다. 나를 지구 끝까지 헤매서라도 찾아올 사람. 그런 사람. 나의 엄마.


엄마가 없어진 걸 알고 세상에 혼자 남은 느낌을 안 건 바로 그때였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으앙으앙 울어재낄 수밖에 없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위로해도, 아무리 맛있는 사탕을 준다 해도, 아무리 좋은 대저택에 산다 해도 엄마가 없으면 다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내 나이 네 살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꼬꼬마 어린아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고작 차려준 밥을 떠먹거나 구겨진 신발을 좌우 바꿔서 되는 대로 신는 정도의, 그만큼 어린아이였다.


그 어린아이가 왜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을까.
그리고 왜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 걸까.

아마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뒤였을 것이다. 불현듯, 생각지도 않았던 그 장면이 재생된 것은.


그 장면 속의 나는 집을 떠나 유랑하다가 철저히 혼자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애타게 엄마를 불렀고 당장 엄마가 눈앞에 나타나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첫 아이를 낳았던 그 무렵 나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던 것 같다. 인천에 있는 친정 근처에서 신혼집을 구해 살다가 남편이 직장을 강동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하남으로 이사를 갔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땅에서 정착하고 적응해야 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마포에 있는 학원으로 출퇴근을 하다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고 6주간 병원생활을 한 후 첫아이를 임신했고 출산을 했다. 많은 일들이 빠르게 일어났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몰라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엄마는 애 키운 지가 너무 오래돼서 엄마도 모른다고 했다. 막막했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책밖에 없었다. 나는 열심히 책으로 공부하며 착실하게 육아를 했다.


어쩌면 나는 첫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의 도움이 절실하고 간절했던 것 같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었고 현명한 답을 듣고 싶었고, 가끔은 아이를 맡기고 외출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한테 통쾌한 답은 들을 수 없었고, 아이를 키우는 건 다 까먹었다는 엄마한테 아이를 봐달라고 선뜻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런 막막함과 두려움이 내 안의 문을 두드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처절하게 외로웠다.


아주 오래전 길을 잃고 울던 그 아이가 다시 눈을 떴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최초의 기억’은 그렇게 다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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