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워킹맘을 고민하는 그대에게

by 김혜정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알 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멈춰 서서

자신의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나를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근처에 농가라곤 하나 없는데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추었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밖의 소리는 오직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ㅡ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예전에 고등학교 때 처음 배웠고 20대에 학원 국어 강사를 하면서 가르쳤던 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 작품을 나는 10대에도 20대에도 거의 절대론적 관점에서만 분석했다. 가지 않은 길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시는 시로 존재하면서 생명력을 가졌고 그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30대에 이르렀을 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내 고민은 단순한 시적 지향점을 벗어나 현실적인 지향점으로 다가왔다. 나의 인생길에서 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현실적인 고민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첫아들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였다. 아이는 8개월이라 거의 하루 종일 먹고 재우고 놀아주고 업어줘야 할 때였다. 결혼한 지는 4년 차였는데 시아버님이 갑작스럽게 편찮아지셨다. 당뇨가 있으셨고 낙상 사고로 다리도 불편하신 상황에 그 당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병원 신세를 져야만 하는 상태이셨던 것 같다. 입원하신 이후 몸이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급격히 나빠지셨고 3개월 정도 지났을 때는 이미 침대에서 앉아있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셨다. 병간호하시는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 8개월 된 어린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자진해서 일주일 간 어머니와 교대하기로 했다. 12시부터 6시 정도까지 어머니께 휴식을 드렸고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아버님을 간호했다. 식사도 못하시는 아버님이 측은해 정성껏 바나나를 까서 입에 넣어 드렸고 먹자마자 나오는 배설물도 그때그때 치워드렸다. 지나고 생각할 때 며느리가 아버님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것이 민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나로선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했다. 10년 정도가 지난 후 지인들에게 그 얘기를 했을 때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었지만 문제는 왜 아들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옆에 계시지만 아들딸은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때 일을 하고 있었다면 며느리라는 이유로 가끔씩 얼굴만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편, 남편의 형과 누나, 그리고 형님은 꼭 그래야만 했을까? 일하느라 바쁜 건 이해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주버님이 세 치의 혀로 던진 한 마디는 비수같이 날아왔고 본인의 의도를 벗어나 나에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가지 않은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했다.


“애만 없었어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텐디잉~”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뭣이라고라?(시댁분들은 모두 전라도가 고향이심). 혼잣말이 아니라 나한테 건넨 말이었다. 무슨 뜻일까.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에 혼자 끙끙 그 뜻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아이가 있어서 아버님 병간호를 조금밖에 못한다? 아이가 있어서 방해가 됐다는 말인가? 아니면 아버님 병간호를 본인들은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월차를 쓰든 뭘 하든 생각이 있다면 사표라도 쓰고 와서 간호할 수 있는 게 자식이 아닌가. 난 너무 기가 막혔다. 내가 일하지 않고 있는 일개 전업주부여서 내가 마땅히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면 그건 아니지, 그게 전적으로 내 책임은 아니지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똬리를 틀고 내 속에 앉아 버렸다. 자식의 도리는 각자의 역량만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자기 마음의 그릇만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스스로 뜻을 내지 않고 어찌 새댁인 나한테 전업주부라는 명목으로 그 책임을 전가한단 말인가.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못 들었겠지 하고 넘기려 해도 무슨 말로 대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님을 돌보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버님은 시댁 식구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분이었고 말없이 내 편이 되어 준 분이었다. 늘 묵묵히 계셨고 어머니 앞에서 어떤 주장도 펴지 못하는 어린양이셨다. 그래서 답답하고 측은했다.

“아가, 설거지 고만하고 여그 와서 같이 먹으라잉~” 집에서 하던 버릇 누구 못주고 시집을 가서도 나는 부엌데기처럼 설거지만 열심히 했다. 요리는 할 줄 모르니까 설거지만 제대로 해도 마음이 편해서. 그런 내 마음을 아시는지 아버님은 늘 나를 가여워하셨고 나를 이뻐하시는 만큼 우리 첫아들도 마음 깊이 이뻐하셨다. 손주 보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셨던 아버님은 결국 몇 주를 못 버티시고 눈을 감으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서러워했던 사람은 결단코 아주버님이었다. 아주버님은 아버님께 효도하지 못한 후회가 우울증으로 남아 몇 년을 고생했다. 나한테 “아이만 없었어도..”라고 말하기 이전에 본인이 두 팔 걷어붙이고 진심을 다해 간호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이란 존재는 참 어리석다. 지나고 보아야 자신의 부족함이 선명히 보이니 말이다. 누나는 아버님 장례를 치른 후에 집에 와서는 울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손톱이라도 깎아드릴 걸~. 손톱이 언제 그렇게 길어졌는지 알지도 못했어.” 그럼 평소에 와서 아버님 손이라도 보시지 않고 뭐하셨어요. 속으로 울분이 터져 나왔다.

짧은 시간 함께 한 아버님이었지만 내 마음엔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남아 있다. 평생을 묵묵히 일만 하시다 가족들의 사랑 표현 하나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 4월 9일이면 아버님 기일이다. 쓸쓸한 뒷모습 이제는 사라지셨으려나. 오랜만에 뵈러 가야겠다.



원래 이 글을 시작할 때는 아주버님의 그 한마디가 가슴에 사무친 일을 계기로 어린 아들을 얼른 어린이집에 보내고 도망치듯 일하러 나간 스토리로 전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모습이 너무 선해서 아버님을 회상하는 글이 길어졌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 탓이다. 하지만 괜찮다. 누가 뭐라 해도 괜찮다.


30대 양육에 지친 삶을 살 때에는 코앞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당장 아이가 중요하고 잘 키우는 일보다 중요한 건 안 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이만 키우면 많은 걸 놓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도, 시댁 안에서의 존중감도, 아이들로부터의 존경심도, 무엇보다 인생의 가치와 보람도.

우리가 이곳에서 글을 쓰듯이 우리의 인생도 창작해 나가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진정한 사랑과 정서적 지지만 있어도 잘 커나간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지만 그래도 10년 후를 생각한다면 꾸준히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길 바란다. 30대 워킹맘을 고민하는 분들께.


그게 나에겐 가지 않은 길이었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한 길이기에.


아주버님의 말을 서운하게 듣고 무조건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꽂혀 일을 빨리 시작하게 되었다. 우연한 일이 동기가 되고 성장을 부추긴 셈이다. 아주버님 기억에는 있지도 않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감사하다. 늘 나를 막내 동생처럼 귀여워해 주시는 아주버님께 그당시 내가 느낀 서운함에 용서를 빈다.



p.s. 아이를 엄마한테 기고 외출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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