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독박 육아

어른이 된다는 것

by 김혜정
‘육아는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부모’라고 해도 ‘부모’가 아니다. 더구나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존재, 폭력을 휘두르는 그 사람에게 보호받는 것 이외에 살아갈 수 없는 약한 존재를 가해하는 자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든 ‘부모’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무거운 책임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젊은 사람들에게 되풀이해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봉제 인형’ 같은 귀엽고 흐물흐물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자의 ‘전면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런 책임을 감내할 만한 심신의 성숙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무거운 책임 같은 건 지고 싶지 않다. 성숙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렇다면 부모가 되는 걸 그만두세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의 인구가 줄어도 전혀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우치다 타츠루, <어른이 된다는 것> 중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아내와 결별하고 딸과 둘이서 산다. 그는 딸이 여섯 살 되던 해부터 부녀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주변에 롤 모델이 될 만한 ‘부녀 가정’이 없었을뿐더러 ‘올바른 부녀 가정의 모습’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어떤 육아 서적도 없었다고 한다. 요즘 육아를 위해 휴직하는 많은 아빠들이 호소하는 어려움도 이와 같은데 30년 전쯤의 그 시절로 치자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이나 30년 전이나 아버지의 육아가 일반적이지 않은 만큼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벗어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읽다 보니 우리 둘째 당숙이 생각났다. 딸을 전적으로 양육했던 1인인 분. 당숙모가 더 재능이 많고 수입이 좋았기 때문에 당숙은 집에 머물러 전업주부로서 사는 길을 택했다. 당숙은 집안일이며 대소사며 모든 일을 도맡아 리하면서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고 희끗희끗 늘어가는 흰머리를 세어 갈 무렵엔 하나밖에 없는 외동을 학원 앞에서 픽업하는 헬리콥터파가 되어야 했다. 들 눈에는 편하게만 보였을지 몰라도 내 보기엔 퍽 애처로웠다.


11년 전, 전세지만 31평으로 이사한 기념으로 친가 친척분들을 모두 초대했던 크리스마스 이브날,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와 2차로 해물탕에 맥주 소주를 대령했다. 기분이 업된 삼촌은 남자들을 우르르 몰아 당구를 치러 나가고 여자들만 남아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기깔나게 준비해 둔 오징어와 쥐포, 값비싼 한치를 구워와 엄마ㆍ고모ㆍ숙모ㆍ당숙모의 틈바구니에 끼어 뒤늦게 맥주잔을 짠 하고 부딪혔다. 대화 속에선 당숙모의 하소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숙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과하게 짜증을 부리고 갈수록 밴댕이 속알딱지가 되어간다며 속이 뒤집어진다고 했다. 너무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어린아이 같다는 얘기였다. 언제까지 눈 감아 줘야 하는지 이제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였다. 당숙모 입장도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했지만 당숙의 속사정이 더 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당숙모께 얘기했다.

“당숙모, 저는 당숙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아요. 집에서 전업주부 하는 게 쉬워 보이시죠?(당숙모는 전업주부를 안 해 봐서 모르시겠지만 이라는 말이 기어 나올 뻔했지만 그건 너무 무례한 말이라 얼른 구겨 넣었다.) 허허거리고 성격 좋아 보여도 속으로는 힘들 거고 당숙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사회생활을 안 하는 백수라 해도 집에만 있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니라 아이도 키우고 집안일도 하는 거잖아요. 사회생활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속이 곪아가는 거죠. 제가 볼 때는 당숙이 우울증인 것 같아요. 조울증일 수도 있구요. 당숙모도 답답하시겠지만 당숙 마음을 먼저 이해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얘기를 찬찬히 들으시던 당숙모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시면서 “내가 지금보다 더 이해를 해야 한다고?? 혜정이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하셨다. 물론 경제적 능력이 없고 집안에서 뒹굴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예뻐보일 순 없겠지만 당숙 본인은 얼마나 자괴감이 들 것이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공허감에, 딸과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것까지 감내하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일까 싶었다. 나도 그 무렵 아이만 키우고 있던 처지였던지라 더 감정이입이 되었던 걸까.


당숙모는 평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잘 내리고 조카인 나나 친척들한테도 가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분이지만 양육에 관해서는 단연코 당숙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결국 당숙 딸은 서울대까지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 지금은 어엿한 20대 후반 여성이다.

그러니 가장의 책무만을 강요하기보다는 양육과 내조의 王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내가 아빠한테 전적으로 키워졌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본다. 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세대(현 40대)에 아빠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가정은 드물었던 것 같다. 우리집만 그랬나? 우린 엄마가 소통의 중간 창구 역할을 했다. 아빠가 좀 엄하셨으므로 불리한 건 엄마 찬스를 썼다. 만약 아빠가 나의 주 양육자였다면 나는 숨통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구구절절 표현할 수 없었을뿐더러 한창 크는 시기엔 부녀 간에 공유할 것도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작은 당숙과 외동딸도 어쩌면 사춘기에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당숙도 갱년기가 와서 서로 쌍심지를 켠 건지도. 아무튼 아버지의 딸 양육은 힘든 것이다. 나도 경험은 없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째 당숙은 이제 60대 초반이시다. 11년 전의 우울감에서 지금은 많이 벗어나셨나 모르겠지만 가끔 집안 행사로 만나 뵐 때면 난 그간의 당숙의 수고로움과 고생에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싶어진다. 독박 육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아빠가 딸 마음을 헤아리고 비위 맞추며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고. 이제는 딸 덕도 보시고 편하게만 사시라고~^^


지난해 10월, 삼촌네 아들(사촌 동생) 결혼식에 작은 당숙이 외제차를 끌고 오셨다. 딸도 없고 와이프도 없이 혈혈단신이었다.

"오~~!! 당숙 차 좋은데요~~!!"

다른 친척들과 달리 단출하게 참석하신 작은 당숙이 외로울까 봐 당숙 어깨에 뽕이라도 얹어드리려는 심산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 당숙은 또 껄껄껄 크르릉 사람 좋은 큰 웃음을 웃으면서

"응~ 이거? 이거 내 차 아니야~~ 당숙모 차 빌린 거지." 하며 활짝 이를 드러냈다.

에구 못 말리는 작은 당숙. 어쩌면 당숙모 말마따나 (아이처럼) 순수하고 철없이 헤헤거리고 털털하기에 망정이지, 철두철미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다면 혼자 외동딸 키우는 건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양육의 길은 레프팅과 같다



누구나 자기를 희생해서 아이를 양육하는 건 힘들고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모든 두려움을 감내하고 해내야 한다. 회피해서는 안 된다. 도망가서도 안 된다. 중도에 포기하려는 나약한 인간이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생각처럼 말이다.


부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동육아를 하면 더 좋을 게 없겠지만 상황과 처지에 따라 엄마가 혼자서든, 아빠가 혼자서든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게 된다 해도 아이에 대한 양육 책임은 져야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그를 진심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니까.


우치다 타츠로 작가도 혼자서 딸을 성인으로 키우기까지 힘들고 곤란한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여정에서 그는 여러 번 어른이 되고도 남았을 거고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는 책을 썼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치다 타츠로는 책으로 점을 찍었고 작은 당숙은 마음의 점을 찍었다. 나는 그 두 점을 속으로 가만히 이어 본다. 우치다 타츠로라는 작가와 작은 당숙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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