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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인생을 위하여

by 김혜정

나는 살고자 한다. 여기에, 바로 이곳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혹독하리만치 냉혹하고 무섭고 치졸하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흙수저가 될 수도 있고 금수저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런 현실은 애당초 현대의 것이 아니라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기원전 35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이제는 우리 집안이 나를 받쳐 주네, 못 받쳐 주네 하고 입씨름하는 것은 그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하는 한탄은 상위 3%의 고위층이 아니고서는 수십 번, 수백 번쯤 해본 일일 것이다. 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날고 기는 사람들의 행보를 좇다가 다리가 찢어질 뻔한 일이 있을 때도, 어느 정도 부를 쌓은 사람이 재테크에 실패해서 크게 낙심하고 땡전 무일푼이 되는 일이 있을 때도, 아무리 열심히 눈뜨고 성실하게 살아도 그냥 하루하루가 하루살이 같은 자신의 제자리걸음에 염증을 느낄 때도 우리 인간이라는 보잘것없는 존재는 무의식적으로 탄식을 하게 된다. 탄식과 후회가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이곳에서 나는, 우리는 매일을 살아간다.




내 인생의 룰렛은 이미 돌려졌다


저마다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인생이라는 룰렛!! 나의 시계는 오늘도 째각째각 어김없이 돌아가지만 이렇게 공짜로 부여받은 한평생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인생을 어느덧 46년이나 살아오다 보니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조용한 유년 시절부터 행복했던 초등학생 시절, 외로운 중학생 시절, 힘들면서도 추억거리가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 햇빛처럼 찬란했던 대학교 시절, 학원 강사로 지내면서 내 안의 틀을 깨고 성숙해 갔던 20대 시절, 두 아이를 키우면서 고군분투하며 24시간과 싸우다가 다시 일을 하며 나를 찾기 시작했던 30대 시절, 그리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많은 욕심을 내려놓기 시작한 40대의 지금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나는 나만의 리그를 만들어 왔다. 그렇다면 이제 내 앞에 남아있는 반평생이라는 시간에는 나의 어떤 모습을 녹여낼 것인가?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작가 장명숙은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싶어요.” 1952년생인 장명숙 작가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패션계를 넘나드는 패션 디자이너다. 벌써 46년씩이나 살았다는 내 너스레에 ‘한창 패기 넘치고 좋을 때’라고 화답할 것 같은 장명숙 작가가 출간한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라는 책을 읽었다. 25년이라는 인생살이의 시간차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무한의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교 색이 짙은 가정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이야기며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이야기, 그리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이탈리아 밀라노로 날아가 유학한 것을 시작으로 디자인 고문 · 구매 디렉터 · 다양한 문화 산업의 코디네이터에 이르기까지 많은 직업적 성과를 이루었지만 나중에는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내어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지나온 시간을 찬란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시간은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신념, ‘새 옷을 사지 않기 위해 몸무게를 유지한다.’는 말,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싶다.’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어쩌면 나와 그리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사시는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산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물론 시간보다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사랑하는 내 가족이지만 가족을 차치하고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시간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다. 결과는 내 뜻과 다를지언정 인생의 룰렛을 과감하게 돌려서 무언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공을 들이는 것이 필수니까 말이다. 인생은 도전이어야 하고 나를 위해 열려있는 길이어야 한다. 아무리 환경이 나를 막을지라도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도전하는 삶이 진정으로 멋진 삶이다. 작가 장명숙은 수많은 도전 끝에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꼬장꼬장한 노익장이 되길 거부했다. 그는 겸손했고 너그러웠으며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다듬어 나갔고 그 안에서 이타심을 배웠다.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는 참사를 겪으면서 인생길을 바꾸었고 아프리카의 어린 생명을 구하는 일에 힘썼다. 여전히 그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튜버로서의 새로운 길에서도 박수를 받고 있다.


비교하자면 내 인생은 별거 없고 그리 찬란하지 못하지만 인생은 도전하고 만들어가는, 순전한 나의 몫인 거라고 생각하며 나도 용기를 낸다. 장명숙 작가가 이루어낸 일 가운데 내 버킷리스트에 있는 것이 세 가지나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후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튜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책을 내는 것이다. 마음을 먹으면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뭐가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이 불쑥 나왔으나 사실은 안다. 그 세 가지를 시도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이다.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 재단에 돈만 내는 것은 진정한 후원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유튜브나 작가는 내가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어렵다. 긴장되고 떨린다. 잘못될까 봐 걱정이 태산 같다. 하지만 장명숙 작가는 처음부터 잘했겠는가? 이탈리아라는 머나먼 타지로 훌쩍 떠났을 때 이렇게 먼 훗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칭송받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과연 예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본성에 충실히 따르고 과감히 도전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고생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시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에게도 25년이라는 세월이 남아 있다. 내가 주저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성사시키고 싶은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천천히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현재의 내 생활에 안주하기보다는 나의 본업을 확장시켜나가는 것 이외에도 내가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이번 주에 새하얀 노트북을 하나 장만했다. 내 인생 최초의 내 노트북이다. 이제는 글쓰기에 시간과 공을 들여서 작가로서의 자질을 만들어나갈 것이고 원래 계획대로 올해 하반기 안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유튜브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위해서도 후원금 보내주기로 시작은 하되 먼 훗날 우리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갈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그때 두려워하지 않고 날아가 볼 것이다.


71세의 유튜버이자 작가인 장명숙의 인생길을 닮아가고 싶다. 늘 감사하고 노여워하지 않으며 활짝 웃는 사람, 도전하고 또 도전하며 애초의 계획에도 없던 일까지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사람, 배려하고 베풀며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생의 끝을 깨끗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25년 후의 나의 모습이 되기를 저물어 가는 노을빛에 기대어 가만히 바라 본다.




죽을 때까지 변화를


우리는 흙수저로 태어났든 금수저로 태어났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음의 평안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냉혹하고 쓰리고 번잡하더라도 내 마음이 고요하면 되는 것이고 내 인생의 여정에 수많은 주름을 만들어 가는 동안 좋은 일들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장명숙 작가가 우리에게 말했듯, 우리 죽을 때까지 변화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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