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달 May 29. 2023

내겐 너무 귀한 이름

“이제야 하는 말인데, 나 우울증 걸릴 뻔했어. 당신이 집에 없으니 자꾸 우울해지고 의지로 극복이 잘 안 되더라.”  퇴원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잠시 후 남편은 나를 집에 내려주고 꼼짝하지 말고 누워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수술을 하며 피를 흘렸으니 소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곧바로 아들과 함께 마트로 향했다. 어젯밤, 매 시간마다 혈압과 체온, 수액 확인을 위해 드나드는 간호사 때문에 잠을 설쳤던 나는 짐 정리도 미룬 채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과 아들이 돌아왔나 보다. 남편은 입구에서부터 아들에게 엄마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조용히 하라며 단속을 했고 연휴 내내 10살 다운 의젓함을 훈련받은 아들은 엄마가 어찌 될까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남편이 소고기와 채소를 굽고 햇반을 데워 점심을 차렸다. 우리는 며칠 만에 한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아들은 엄마가 돌아오니 입맛이 돈다며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워냈고 남편은 오늘은 술맛이 좀 돌 거 같다며 웃었다. 나는 함께 마셔주진 못하지만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며 오늘은 맘 편히 한 잔 하라고 했다.



저녁 시간, 가족이 또 한데 둘러앉았다. 아이는 라볶이를, 아빠는 육회에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소화가 힘든 나는 수박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아이가 먼저 저녁을 다 먹고 일어나자 남편이 말했다.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당신 옆에 처제가 있긴 했지만 여기서 아들과 기다리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 어쨌든 잘 끝나서 다행이다. 오늘은 술이 다네. “

술이 달다는 남편은 그때부터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식물을 기르며 인생을 알았다고 했다. 수술 부위 유착을 막기 위해 식탁 주변을 걸으며 얘기를 듣던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당신이 왜 우울했는지 알겠다!”

“뭔데?”

“이거네. 이거!  말하고 싶어서, 봐봐요를 못해서 우울했네. “ (봐봐요 병은 ‘남편의 불치병’이란 글을 참고하세요.)

“하하. 그런가 봐. 이제 안 우울해.”


술자리가 마무리되어 가고 각자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이와 1층에서 함께 잘 테니 수술 부위가 완전히 아물 때까진 2층에서 혼자 자라고 하고 내려갔다. 하지만 아이는 선뜻 내려가지 못하고 엄마가 누운 침대 곁을 맴돌았다.

“오늘은 엄마랑 자고 싶어? 그럼 이리 와. 엄마 옆에 누워.”

“그건 절대 안 돼요! 제가 잠결에 엄마를 다치게 할지도 몰라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침대맡에 고개를 빼꼼 내미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괜찮으니 옆에 오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제법 완강했다.

“엄마랑 자고 싶지만 다치게 하는 건 더 싫어요. 저 그냥 여기서 잘래요.”

결국 아이는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 여기 누우면 잠이 잘 안 올 줄 알았거든요? 근데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잠이 잘 오네요.“

잠시 후 쌔근쌔근 잠든 소리가 들려왔다.


편안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내 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면 여자의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아쉬워했지만, 가족의 입맛을 돌아오게 하고, 술맛도 돌아오게 하고, 우울함을 낫게 하고, 편안히 잠들게 하는, 내겐 너무 귀한 이름. 나는 아내 그리고 엄마다.

이전 09화 힘들 땐 일상으로 돌아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