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의 것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기어이 서로를 가졌다.
이 질투 많고 소유욕 많은 두 아이가 서로를.
여자는, 기어이 자신의 조각을 떼어주기로 했다.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흩어진 잔해 중 가장 모나지 않고
결이 고운 것을 찾아 수줍게 손에 꼭 쥐고 있다.
이런 나라도 좋아해 주길 바래.
이런 나지만 부디 품어주길 바래.
종이로 만들어진 마음을 가진 그 여자는
제 안에 모난 돌만 주워 담고 실컷 흔들리며
내면을 다 까지게 만들던 날을 지났다.
불순물은 모두 날아가 흩어져 버렸고
텅 빈 곳에 남자가 들어와 가득 찼다.
벅차도록, 벅차도록.
사랑한다는 가볍고도 무거운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게 될 것만 같아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사랑이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이름 붙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멍청하게도.
이따금씩 목울대를 치며 올라오는 감정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꼭 감았다.
눈에 담지 않으면 마음에도 담기지 않을 것만 같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그 속에 기어이 비집고 들어와
피어나고, 자라났다.
여자의 초록은 더뎌서 남자의 만개를 목격하고
마침내 그 꽃잎이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
언젠간 흐트러지겠지, 나를 놓아버리겠지.
그리고 썩어지겠지.
제 자신은 불행히도 그제야 움트겠지.
그러나 달랐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니던 여자는
마침내 상처 받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흐트러지고 놓아버리고 썩어지겠지 라는 것들은
사실 예견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대 그렇게 되지 말아달라는 애원이었음을.
마침내,
안녕. 사랑해.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결국엔 사랑하게 되었어.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무너질까.
너를 나의 세상으로 만들고 그 세상이 무너지면
그 잔해에 깔려 얼마나, 얼마나.
여자의 눈썹은 속상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정확히 팔자를 그린다.
그러다 어느 날 찾은 어린 시절 사진에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열손가락으로 세어지지도 않는 나이를 먹고서
서넛 무렵에나 짓던 그 표정을 짓는다.
남자의 눈빛 한 번에 돌아앉은 뒷모습 한번에
무엇이 그리도 쉬이 속이 상하고 서글픈지.
여자는 가끔보다 더 자주 얼굴이 붉어진다.
살고 살아내느라 닳고 닳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 것이 많은지
남자의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얼굴이 발그레 해진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오므리며 가뜩이나 깊은 보조개가 더 깊어진다.
좀처럼 뛰지 않는 여자는
퇴근 후 버스에서 내려 양팔을 펭귄처럼 벌리고
깡총이며 집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분명 아침에 본, 어제 자기 전에 본
그 얼굴이 너무나 그립고
그 존재가 너무나 고파서
설레는 마음으로 달음박질을 한다.
숨이 차게 뛰어온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문 앞에서 호흡을 고른다.
익숙한 숫자를 한 비밀번호도 재빨리 누르지 못하고
버벅이다가 마침내 현관으로 들어서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다가가 안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정말 모든 것이 변한다.
우울하고 불안한 것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본인이 아니게 된 듯한 느낌에 어리둥절하다.
그러나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
매일이 더없이 소중하다.
함께하는 시간은 빠르면서도 느리게 흐른다.
여자와 남자의 행복은 이렇게 오래도록 천천히.
혹시 올지도 모르는 불행은 느낄 틈 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기를.
여자는, 무뎌지지만 말자 다짐한다.
결국 결론이길.
마침내 종결이길.
끝끝내 끝의 시작이길.
살며 바라온 그 어떤 것보다 더욱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