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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장님께

by 윤한솔

친애하는 김 원장님께.

선생님,

저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작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모든 것은 제가 저인 이유 때문입니다.

저의 불안이 모든 관계를 망치고

저의 우울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망친 것이지요.

이제야 겸허히 인정합니다.

내게 나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고

내가 가장 나쁜이였다는 것을요.

아, 이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것 역시 병증의 하나일까요?

역시, 저는 지독히도 저일 수밖에 없나봅니다.

선생님,

저는 구걸하여 받는 사랑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주하는 모든 이에게 매번 납작 엎드리곤 합니다.

제겐 사랑이 전부니까요.

담뿍 사랑받아 잠겨 죽는 것만이 제 생의 유일한 목적이니까요.

그러나 왜 이다지도 쉽지 않을까요.

간절히 원했던 탓인 걸까요.

남들이란 것은 어차피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남들은, 남들은 그렇게 안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그런 게 안 되는지

왜 나만, 왜 나만.. 이라며 선생님 앞에서 눈물짓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여전합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 속에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를 이리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임을 알아도

조금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말하셨지요.

이정도 규모의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가벼운 검진이나 경미한 증상인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요.

검사 결과표의 막대기는 모두 하늘로 치솟고 있었습니다.

살며 백점만점을 받은 경우는 이런 검사에서 뿐이란 것을 선생님께선 아실런지요.

선생님께서는 진료가 마무리 될 즈음에

인사하며 일어서면서 변하는 제 시선의 높이를 따라 오며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것이 참 좋았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제가 조심히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거든요.

눈빛과 어투에서 저는 마음을 읽었거든요.

또 한 번은 제가 몇 달을 뜸하다가 찾아온 날에 이렇게 말하셨죠.

잘 지내셨나요? 걱정 많이 했어요.

타인 중의 타인이고 수많은 환자 중의 한 명일 저에게

그런 따뜻한 말을 건네시다니요.

그날로 저는 다 낫는 때까지 선생님을 쫓아다닐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하다가 제가 해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은 말투로

“OO씨는 성격도 좋고 글도 잘 쓰니까요.” 라고 하셨지요.

선생님 앞에서 저는 울기만 한 것 같은데,

제가 쓴 글이라고는 검사지의 문장을 채우는 것뿐이었는데

저를 알아보신 걸까요.

나의 장점은 굳이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아도

타인에게 명확히 보이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화는 저에게 또 다른 긍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이번 방문 때는 제가 말하였죠.

나쁜 짓 안한다고 약속할 테니까 잠을 잘 수 있는 약을 더 달라고요.

선생님께서는 약을 바꿔주셨고

네, 약이 잘 안 들어서 제멋대로 횟수와 용량을 바꿨습니다.

그럼에도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저는 매일 새벽을 서너 번씩 맞이한답니다.

눈을 떠 시계를 보고 절망하는 일을 매일 서너 번씩 겪는답니다.

어젯밤 다시 또 새벽 1시에 귀신 쓰인 것 마냥 눈이 떠졌을 땐

머릿속에서 제가 외쳤습니다.

아. 죽고 싶다.

이토록 강렬히 죽고 싶다는 문장이 울려 퍼진 적은 처음입니다.

아닙니다. 처음일리가 없지요.

다음번에 갔을 땐 더 간절히 빌어볼 요량입니다.

선생님, 제발 저 좀 죽은 듯이 잘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말이죠.

선생님.

관계란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너무도 어려워 정신이 사납습니다.

신체에 고통이 가해지는 냥 이를 꽉 깨물고 눈을 꼭 감고 버티는 날이 늘었습니다.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에 마음이 다 쓸려 너무나 따갑습니다.

저는 병신처럼, 병든 닭처럼

남들이 깨있는 시간에 꾸벅 졸고

남들이 자는 시간에 멀뚱히 눈 떠 있는 것밖엔

할 일이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겨우 그런 내가 어쩌자고 이 관계를 시작했을까요.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 끝을 두려워 말고 그만 두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를 못해서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닿았고

저는 곁에 가장 가까운 이를 두고 몰래 썩어가고 있습니다.


감히 살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 어쩌자고 감히 살려는 희망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스스로가 끔찍합니다.

늘 그렇듯 죽고 싶어 하면서 술이나 퍼마시면 될 일을

왜 굳이 다른 이를 제 삶에 끌어들였는지

몹시도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그냥 입을 처닫고 멍청히 모르는 척 못 본 척 아닌 척 뭉개려 합니다.

늘 그랬듯이 말이죠.

그러다보면 언젠가 곪든 터지든 아물든 뭐가 됐든 되겠지요.

선생님,

언제쯤이면 더러 슬퍼지는 일을 멈출 수 있을까요.

언제쯤이면 누군가 나를 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을 끝낼 수 있을까요.

제가 저를 구원하는 일은 살며 없을 일인 것을 알아서

누군가 그걸 도와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가끔은 분에 넘치는 일을 원하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그런 것을 바라면 안 되는 사람일까요.

혹시 이건 팔자의 문제일까요?

네, 반은 농담입니다.

반은 진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밤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주신 약을 먹고 잠들어도 저는 다시 세 시간을 자고 나면 깨버리겠지요.


선생님,

저는 부디 제가 영원히 잠들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오래도록 오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잠시나마 제 걱정에 저를 떠올리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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