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로망의 그 어디엔가 1
-내 청년의 '윗목' 이야기-
세기말이라고 뒤숭숭하던 99년에 수능을 치르고 00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선배들은 새내기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담아 '밀레니엄 학번', '즈믄내기(국문과다운 네이밍)'등의 이름을 붙여 우리를 불러주었다. 70년대생 선배들은 종종 늬들이 '격동의 70년대'를 아느냐를 외치며 우리를 대해서 정말 스무살 아기가 된 느낌으로 학교를 다녔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대학생활은 경제적 어려움이 늘 근저에 있었기에 빛났지만 아팠고, 그럼에도 빛이 났다.
97년도에 IMF라는 큰 일을 겪으며, 우리는 가방에 붙은 외국상표를 가리기 위해 작은 태극기 와펜을 구입해 달았고, 여고생들의 다이어리를 오밀조밀 꾸미기에 탁월했던 0.5밀리 일본산 색색의 펜 구입을 포기했었다. 교실에서의 변화는 소소했으며, 지금 떠올려보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각자의 가정에서는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시작했던 우리집은 IMF 한방에 무너졌다. 부모님 평생 노력의 집약체였던 24평짜리 아파트는 너무나도 쉽게 날아가버렸고, 우리 네 가족은 3층 상가주택 전세에서 또 다시 어느 오래된 구옥 월세로 옮겨가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4월쯤, 학교에 갔다가 이사를 마친 집으로 들어서서 상상초월인 집의 형상에 기함하고 있는데, 대문 문주에 기댄 아빠가 반쯤 주저 앉아 소리없이 울고 계신 모습에 더 이상 투덜댈 수조차 없었다. 봄꽃이 한창인 때라 마당으로 나비가 날아들고, 하필 햇살이 맑게 반짝였는데, 아무렇게나 놓인 이삿짐으로 어수선한 마당 한켠의 아빠 모습은 그림처럼 한 장면으로 남아서 떠올리면 늘 마음이 저리다.
그 집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평생을 아파트에서 지내다 스무살이 되어 처음 접한 구옥은 비명을 지를 일이 차고 넘쳤다. 화장실은 양변기가 아니었으며, 물 내리는 버튼이 없어서 직접 수도를 틀어 해결해야 했던 그 집. 주방은 반지하라서 높은 턱을 두세 개 정도 내려가야 했는데, 진짜 그곳이 어두웠는지 아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기억 속에는 주황색 백열등이 켜져있어도 늘 어둡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느 해인가 장마였다. 뉴스에서는 우리 동네에 큰 비가 온다고 들썩였고, 정말 비가 많이 왔는데, 그러자 부엌에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금세 발목까지 차올랐다. 장판 밑의 모든 먼지를 담아나온 듯, 뿌옇고 푸르스름한 빛을 띄던 그 물은 절망 그 자체로 보였다. 우리 가족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비유같았던 그 날의 부엌. 쓰레받기로 그 물을 퍼내며 너는 방에 들어가있으라고 외치던 엄마의 모습. 엄마도 그 집에서 지낼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종종 이야기하신다. 여름과 겨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그 집에서 우리는 5년을 버텼다. 집주인은 우리가 나가고 난 후, 그 집을 부수고 새로 지어 주변 집들과 함께 그럴싸한 빌라를 지었다. 돌아가서 추억할 수 없게 만들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그럼에도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 마음을 두기 위한 것인지, 우리가 위로받길 바란 것인지 모르지만, 엄마는 마당 한켠에 온갖 작물을 심어 철마다 꽃이 피었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끈에 여주와 수세미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아빠는 마당에 흰 나비가 자주 날아왔는데, 아무래도 당신을 찾아온 것 같다고 내게 이야기했었다. 사춘기였던 남동생은 별채처럼 떨어진 방에 혼자 지내며 자유로운 영혼을 불태웠다.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고기를 구워먹는 날에는 마당있는 집에 사니 이렇게 내 하늘이 있다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눈이 왔을 때는 마당에 쌓인 나만의 '눈'으로 놀아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떠올려보니 눈을 쓸어본 기억은 없어서 갑자기 조금 미안해진다.
어느날은 엄마가 부엌에 아무래도 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며 쥐끈끈이를 주방 한 가운데에 놓고 일을 나가셨다. 얼핏 지나가며 그걸 보고는 저렇게 한복판에 놓으면 '어느 바보'가 잡히냐고 웃어 넘기고는 방에 있었는데, 몇 시간 후 끼끽!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이 연상되니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설마하며 소리를 들어보니 '어느 바보'가 우리집에 진짜 있었다. 당장 울며불며 엄마에게 전화해서 쥐가 잡힌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엄마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근처에 사시는 이모부뿐이었던게 화근이었다. 이모부와 내 동생은 버둥대는 쥐를 보고는 공포에 질려 뇌가 정지되었고, 결국 주변에 굴러다니던 텅 빈 사이다 페트병으로 쥐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모부는 겁에 질려 때리고, 내 동생은 맞은 쥐가 버둥대니 놀라 소리지르고 욕하고. 그 욕하는 모습에 놀란 이모부는 또 겁에 질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악다구니 속에 '공기 반 페트 반'으로 맞은 쥐는 결국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두 남자는 더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고, 엄마가 집에 오신 후에야 결과물이 처리되었다. 엄마가 올때까지 나는 방에 격리 아닌 격리되어 있던, 그야말로 웃픈 기억.
국문학이 좋아 전공으로 선택했으나, 시에서 오는 절절한 감동은 삶을 살아가면서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요절한 천재시인이라 불리는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이라는 시를 수험생으로 배울 때는 기다려도 엄마가 안오신다는 그 막막함과 두려움을 '찬밥'처럼 방에 담겨있다고 표현한 것에 감탄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고난을 몸소 겪어내고 돌아보는 지금 '내 유년의 윗목'이라는 구절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절감하고 있다. 온기가 닿지 않아 서늘한 '윗목'으로 어둡고 외로웠던 시기를 담아낸 천재적 표현력에 박수를. 굳이 따라해본다면 나의 대학생활은 '내 청년의 윗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