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으로 8년 차 직장인쯤 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속에 적당히 스며들고 어우러진다. 전보다는 의연해졌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실수는 존재한다. 그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상황들도 왕왕 있다. 반성하고 작아지고, 반성하고 작아지는 반복이 심해지면, 성장하기는 커녕 주눅만 든다. 어릴 때는 시금치 한 쪼가리만 먹어도 듣던 칭찬인데, 이제는 잘해도 본전이고 타박만 안 들어도 다행이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를 부정적인 시선들이 줄줄이 상상되고 숨이 막혀오기도 하는데, 나를 묶고 있는 그런 시선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내고, 무시해야 할 순간이 온다. 피로감이 누적되어 몸까지 아파오는 것 같으면, 이때는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을 택하는 게 최선이다. 되도록 빨리, 짧더라도 말이다.
이번 주에도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강한 갈증을 느껴 충동적으로 타 지역으로 향하는 주말 비행기표를 끊었다. 아침 비행기에 올라 하얗게 반짝이는 구름을 눈동자에 담는 순간부터 해방감에 휩싸였다. 하늘을 계곡 삼아 구름 사이를 덤덤하게 흘러가는 기내에서 새삼스레 아이처럼 ‘금속 덩어리에 담긴 인간들이 공중에 있다니!’ 하고 아주 사소한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기체가 짜릿하게 흔들릴수록 안전하다고 토닥이며 일상과 분리되는 잔잔한 설렘을 느꼈다. 청명하게 맑은 하늘 아래 깔린 푸르른 대지를 황홀하게 바라보며 예감했다. 갑작스러운 이 여행을 오래 두고 사랑할 수 있겠다.
주위의 몇몇은 누군가의 낮아진 자존감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돕고 위해 주기보다는 충고랍시고 업신여기고 무례하게 군다. 마치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라는 냥 우쭐대기도 한다.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비즈니스 호텔에 짐을 풀고 푹신한 침대에 앉았다. 우쭐대는 누군가의 잔뜩 높아진 콧대 너머의 시선은 사라지고, 높아진 층수만큼 작아진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온전했다. 그리고 고요함이 방을 가득 채웠다. 현실을 피해 도피한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느슨한 시간과 적막 덕분에 한 발짝 뒤, 여유로운 통찰이 가능하였다.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구분되지 않은 채 넝쿨처럼 얽혀 도시의 빌딩을 가득 덮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막아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밖으로 나가 전시회며 꽃이며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들을 구경을 했다. 봄이 잔뜩 묻어 있는 한강과 도로를 지나는데, 돌담길 풍경을 배경으로 한 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사는 어린 딸이었다. 아기 티를 이제야 벗은 듯한 아이가 머리에 풍선 머리띠를 끼고 자세를 바꿔가며 ‘하나 둘 셋 찰칵’ 하는 귀여운 모습에 길을 지나는 행인 모두 웃음을 지었다. 산책의 목표는 오로지 ‘사랑스러운 것들을 많이 보자!’ 였는데, 낯선 길이라서 그런지 더 사랑스러운 것들을 많이 포착하게 된 것 같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나는 욕망을 모두 제거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기에 정원사처럼 욕망을 적절히 분배하고 구분하며 가지치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게 작은 행복 몇 개가 소복하게 열린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사실, 회피 아닌 회피처럼 불쑥 거주지를 서울로 몇 년간 옮겼던 적이 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남들이 타지로 갈 때 ‘외로우면 어떡하지’와 같은 고민을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새 없을 정도로 우울하고 괴로웠던 시기였다. 몇몇은 떠난다고 하니, ‘도피한 곳에 천국은 없어. 그런 갈등은 어디든 있을 거야. 현재 네 상황에 적응을 해봐.’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그런 조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 삐뚤게 바라보자면 행복을 위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행동을 소비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도망친 곳에 답이 있었다. 퇴근 후 나를 기다리는 것은 외로움이 아닌 여유로움이었다. 전에 없던 평화로움과 안락함,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내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문제 상황에 오랜 시간 절여져 흐물흐물 생기 없이 스스로를 잃어가는 나를 견디기 힘들었는데, 외부 시선을 줄이고 나를 돌보는 힘이 길러졌다. 이것저것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에 도전했다. 실력이 없는데 아는 사람들을 만날까 두려워서 수강하지 못했던 댄스 학원에도 다녔다. 학창 시절부터 배우고 싶었던 바이올린 학원도 다니고, 자전거 타고 출퇴근도 했다. 한강 달리기, 주말마다 놀러 다니기,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그림 그리기 등등 삶을 내가 원하는 것들로 잔뜩 채웠다. 그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도 훨씬 낮았다. 타인의 평가를 잘 못 견디는 성격이고, 샤이 휴먼이라 못하는 것들을 들키고 싶지 않은 내게는 최고의 지역이었다.
나무에게 당도 높고 열매가 잘 열리는 비옥한 토지가 따로 있듯, 내게도 행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잘 열리는 장소가 따로 있다. 환기가 잘 되고 익명성의 바람이 잘 부는 곳, 긍정의 햇빛이 내리쬐는 곳. 꾸준히 물을 주듯, 아주 친한 사람의 관심 조금만 있으면 된다. 그 관심은 많지 않아도 되고, 오염되지 않아야 하고, 꾸준히 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런 곳에서 행복의 열매를 맺는다. 취미생활을 마치고, 집 가까운 단골 카페에 들어가서 마시는 아인슈페너는 타지 생활의 달콤함의 끝이었다.
무조건적인 도피는 답이 아니다. 하지만 짧은 도피든, 영원한 도피든, 도피하는 것이 답인 순간들은 있다. 일과 타인의 시선에 치이는 때에는 아인슈페너를마시는 여유로움이 없었다. 왜인지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면 몸이 굳고 잠이 많아진다. 취미생활의 의욕도 사라지고, 커피도 차갑고 쓴 아메리카노만 찾게 된다. 권력구조가 맞물려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관계를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서로 타협하는 것이 아닌, 나를 일방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외부의 시선을 민감하게 느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나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건 상대적이라서, 누군가에게는 서울이 일에 치이고 예민해지는 곳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나와 주파수가 잘 맞고 행복의 열매를 맺는 곳을 찾는 노력은 절대 소비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을 더욱 사랑하기, 우연히 오게 된 지구에서 행복이라는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 그것이 나에게 소소하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저마다의 행복의 열매를 맺어 나누는 상상을 하며, 호텔 침대에 누워 아인슈페너 맛집을 검색해 본다. 밤이 되어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유난히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