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 ]
파릇한 청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의 삶은 세월을 건너뛰었다
새벽 2시나 되어야 잠을 청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마의 주름과 하얗게 덮인 머리가 눈 밭이 된 요즘은
9시가 넘으면 이불속의 따듯한 온기가 나를 부른다. 약간의 스트레칭으로 몸의 긴장을 풀어주면 티브이 화면의 반짝 거림에도 눈꺼풀이 무거워져 이내 잠에 빠져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머릿속을 헤집는 복잡한 머리가 잠을 깨운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의 시간을 보면 기껏해야 3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이 생각 저 생각,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과 현실의 벽을 실감하는 심정이 혼재되어 뒤죽박죽 뭔지 모를 혼돈 속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멍하면서 몸은 축 쳐져있지만 맑아지는 머리에 몸과 마음이 함께 지쳐간다
하나 둘 셋.. 숫자도 세어보고 잔잔한 음악을 떠올리고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쉽지 않다. 잠을 설치면 다음날 피곤함에 찌들어 꾸벅거리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 30분이라도 숙면을 기대하며 노력 아닌 강제를 요구한다. 뒤척거리다 포기하고 시계 보면 6시가 넘어선다
눈은 떠지고 창으로 새벽빛이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환하게 들이치니 다시 잠을 청하기를 포기한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옆에 갖다 놓았던 텀블러의 물을 들이켠다 큰 컵으로 한잔 정도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는 습관은 벌써 20년 이상을 하고 있다 밤새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며 몸을 깨우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하루의 루틴은 사과 한쪽 먹는 것으로 시작된다
[ 하루 루틴의 시작 ]
예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야 6시면 벌떡 일어나 출근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자영업을 하고 있는 요즘은 구애받는 일이 없어서 인지 시간에 쪼들리는 아침은 아니다
사과 반쪽으로 하루를 준비한다 언제부터인가 아침 사과가 몸에 좋다고 하니 가을부터 봄까지는 사과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아내의 배려 덕분이다 그러나 밥은 내가 손수 챙겨 먹는다 국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반찬을 꺼내 하루의 첫 끼니를 때운다 평생 아침을 거른 날은 손꼽을 정도로 아침밥에 진정이다 한 숟갈을 먹던 국에 밥을 말아먹던 반드시 아침의 형식을 지키는 것은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식사 끝난 후 잠시 숨을 고르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는 배변의 습관도 수십 년 몸에 배어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내가 건강을 지키는 기본적 수칙의 두 가지가 아침의 물 한잔과 배변이다
[ 홈 쇼핑의 고문 ]
씻고 나와 옷을 입고 출근하기까지 약 20~30분의 여유가 있다
그 시간은 항상 티브이의 홈쇼핑을 보고 있는 아내는 눈요기로 대리 만족을 즐긴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고문받는 시간과 다름없다
가벼운 옷이나 적당한 금액의 화장품 종류 또는 생필품을 보고 있을 때면 '사고 싶어? 주문해, 내가 사줄게' 하면 쓴웃음으로 거부의 표정을 짓는다
고급 명품 백과 금덩이 귀금속 같은 장면이 나오면 모른 체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고역이다. 아니 무슨 백이 그렇게 비싸고 왜 몸에다 금덩어리를 달고 다니는지 남자의 입장에서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아내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해 자괴감 마저 든다
[ 출근길 ]
사무실로 향하는 길은 2방향이 있다 시간과 거리는 어떤 곳으로 가던지 엇비슷하다
내비게이션으로 도착지를 입력하면 항상 한 곳의 코스만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그곳으로 가지 않고 내가 즐겨 다니는 길로 향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 길은 언덕을 넘어 8차로 6차로 4차로로 다양하게 변화하며 구불구불 기분 좋은 길이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이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가 항상 나를 반겨주고 위로도 해주는데 봄바람에 살랑거림을 느끼며 목련꽃과 벚꽃이 번갈아 거리를 수놓아 지루하지 않게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준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나무 잎이 손을 활짝 펴고 흔들어 꼭 내가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 같은 벅참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화창하면 파란 하늘의 기분을, 흐린 날에는 오묘한 잿빛 색감을 감상하며 느끼면 느끼는 대로 일상의 출퇴근 길이다
도심의 복판에 이런 멋진 길이 있고 내가 이 길을 이용하며 위로받는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삶의 단비 같은 소소한 기쁨을 준다.
6년 정도 이 길을 다니고 있지만 크게 변화 없이 늘 한결같은 분위기의 길을 왕복으로 다니고 있다. 기분 좋은 출근길은 '오늘은 하는 일이 성과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차에 흐르는 음악을 즐긴다.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은 우울한 퇴근길에는 차 안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핸들을 때려 보기도 하고 스스로 답답한 감정을 해소한다
[ 사무실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머리 위를 살짝 스치는 나무아래로 나만의 공간인 사무실에 들어오면 컴퓨터를 켜고 커피 한잔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출근길에 아름다운 도로를 지나왔지만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꼭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주차장 화단옆에 서서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하늘을 바라보고 나무들의 변화를 느끼며 하루일과를 생각한다. 오전에는 믹스커피를 마시고 점심 후에는 커피만 들어있는 스틱커피를 마시는 것도 오래된 일과의 반복되는 습관이다
파란 잎들이 커져가는 나무들을 올려다보면 그 끝에 칙칙한 콘크리트 건물들과 교회 십자가 그 위로 보이는 높은 하늘을 바라봄은 나의 작은 행복한 습관이다
사무실 공간에서의 하루 일과는 무료할 때는 명상과 공상하며 음악을 듣기도 하고 바쁠 때는 일이 밀려 들어와 불나는 전화받기도 바쁘고 확인해야 할 사항도 많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아직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만족이다
하루 일과 중 가장 고민되는 순간이 점심시간이다. 예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구내식당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식사를 했지만,
홀로 사무실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비애중 하나인 점심 먹기, 뭘 먹을까 하는 선택은 고민 중에 고민이다. 날씨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는 마음이 선택장애를 가져온다. 혼자 식당에 가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오늘은 그냥 햄버거로 때울까? 우중충한데 따듯하고 얼큰한 해장국을 먹을까? 아님 나가기 귀찮은데 사무실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별것도 아닌 걱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나 자신이 웃기기도 하지만 먹는 즐거움보다 선택의 순간이 너무 싫다
[ 귀가 길 ]
계절의 변화로 해의 길이가 짧아지고 길어 짐에 따라 퇴근시간이 달라진다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때는 오늘 저녁엔 뭔 좋을 일이 없을까? 누가 만나자고 전화가 오지 않을까? 아니면 친구 불러서 한잔하고 들어갈까? 일부러 일을 만들려고 고민했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요즘은 모든 것이 귀찮고 오로지 귀가만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집에 가서 혼술이나 하지 그게 최고야 하고 스스로 위안하며..
지금 시간에 출발하면 차가 많이 밀리겠지 10분만 더 있으면 도로가 덜 붐빌 거야, 라며 이리저리 통박을 잰다
아직 밝은 시간의 퇴근은 진한 푸르름과 바람을 맞으며 구름 사이로 뿜어 나오는 햇빛을 보고 강을 건널 때 보이는 강변의 여유로움을 즐긴다. 땅거미 지는 시간엔 자동차 불빛의 눈부심과 운치 있는 저녁노을을 만끽하는 귀가 길도 멋진 눈앞의 그림이다
서쪽으로 향하는 귀갓길은 언제나 황혼의 노을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도 저 노을과 같이 마지막 화려함을 뽐내며 넘어가길 가슴으로 빌어 보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이다
[ 잠들기 전 ]
집에 도착하면 문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성질 급한 나의 평생 루틴이다
요즘이야 넥타이를 안 하지만 예전엔 넥타이 푸는 것이 첫 번째 귀가 시 행동이었다
늘어가는 뱃살에 소심하게 걱정이 되어 실내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루의 마무리하는 일의 순서에 포함된다
씻고 나오면 '식사해~'아내의 상차림에 티브이 앞에서 식사를 한다.
요즘은 정말 티브이를 볼 만한 프로가 없다. 신물 나는 정치 관련 뉴스는 아예 거들떠보기도 싫고 오락프로나 보자고 하면 여기도 이 사람 저기도 저 사람 아니 세상에 방송에 출연시킬 사람이 그렇게 한정되어 있나? 싶을 정도로 매번 같은 사람만 여기저기 보이니 그것도 짜증 나고, 먹방이 유행하니 여기저기 먹방과 여행, 그리고 짝짓기 하는 연애프로가 왜 이렇게도 많은지, 내가 정해 놓고 보는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딱 하나다. '골 때리는 그녀들' 몇 년 전 어설프게 시작해 웃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완전 선수들이 되어 버린 출연자들의 성장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식사 후엔 또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잠들기 전까지 혼자 이것저것 즐긴다. 사무실에서 못다 한 일들도 마무리하고, 끄적끄적 글도 써보고..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돌아오면 저절로 잠자리에 들어야지 하는 생각과 몸이 반응한다 완전 노인네의 생활패턴으로 바뀐 것 같다
[ 행복해 지길.. ]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의 무심한 시간들이 서글프다고 느끼지만 어떤 특별한 방법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똑같은 생활 속에서 덤덤하게 살아가는 나의 존재 가치는 점점 작아져 간다
오늘 밤엔 행복한 꿈으로 내일의 활력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