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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솔나무(3)

                  - 태풍 -

by 김세광 Feb 28. 2025

해마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태풍이 찾아와 우리를 괴롭혔다. 무장한 군대처럼 함께 몰려온 많은 비와 거센 바람 때문에 우리는 꼼짝없이 방에 갇혀 지내곤 했다. 우리가 살았던 집은 볏짚을 엮어 지붕을 씌운 초가집이었다. 뒷문을 열면 뒤란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깎아지른 언덕 위로 대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태풍이 닥치면 가장 먼저 대나무들이 부딪히며 으스스한  비명 소리가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았다. 뒤란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는 귀를 후벼파듯 요란했고 마당에는 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는 무료하고 무참한 시간이었다.


쉬임 없이 퍼붓는 비바람에 집안은 축축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많은 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초가지붕의 천정에서 급기야 물이 새기 시작했고 빗물은 곧 마루에도 부엌에도 떨어졌다. 부랴부랴 집안에 있는 많은 그릇과 냄비들이 동원되었다. 작은 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면 이내 큰 방울이 되었고 다시 그릇 속으로 떨어지는 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릇마다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들은 화음을 이루며 방안을 헤집었다. 뜻밖에도 처량한 빗속에서 피어난 소리들이 심란했던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갈수록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커졌고 속도는 빨라졌다. '우! 우!' 큰 바람이 지날 때마다 대나무들이 우는 소리는 우리 모두를 심란하게 했다. 뒤란의 밭 뚝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걱정과 당장 피신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독촉에 10여 명의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으로 몰려갔다. 우리들은 좁은 방과 마루에서 몸을 맞대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춥고 배고픈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 언덕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우리 집은 우리들 신세처럼 처량했다. 달리아꽃이 탐스럽게 피었던 화단도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던 툇마루도 비바람에 젖어있었다. 방에 쪼그린 채 누워서도 집이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가족을 잃어버린 집은 빗물 공세에 잔뜩 움츠려있었다. 이러다가 우리 집도 우리 마을도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휩싸곤 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선주(船主)들은 가장 먼저 중 솔나무를 찾았다. 포구에는 높은 파도를 감당해 내거나 막아줄 마땅한 접안 시설이 없었다. 배들이 피신할 방법이라곤 오로지 모래펄 뒤쪽으로 올려진 다음 튼튼한 밧줄로 나무에 묶는 수밖에 없었다. 태풍을 맞서기에는 형편없이 부실하고 허술했다. 중솔나무는 전쟁을 앞둔 용맹스러운 장수처럼 온갖 배들의 구명줄을 치렁치렁 몸에 휘감았다. 배는 나무와 연결된 밧줄로 파도를 버텨야 했고 사람들은 길 모퉁이에서 서성거리며 태풍이 무사히 잘 지나가길 기도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비바람은 거세어졌고 파도가 높아지면서 배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난 파도는 겹겹이 대오를 이루며 마을 깊은 골목까지 다가왔고 나란히 서 있던 집들마저 물바다로 만들었다. 배는 단단한 밧줄로 묶여있었지만 중솔나무에 가해지는 무지막지한 파도의 힘은 그의 깊은 뿌리까지 들썩이게 했다.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에 배들이 중심을 잃고 부딪히자 ”어떡해! 어떡해! “ 안타까워하는 여인들의 소리와 차마 바라보기가  힘든 남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에 떠밀릴 때마다 밧줄은 끊어질 듯 팽팽했다. 배는 생사의 경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바둥거렸고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손아귀에도 힘이 가해졌다. 배들은 파도의 뭇매질에도 끈질기게 버텼지만 어느 한순간 텅! 텅! 하는 굉음이 울리면서 밧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멎은 듯한 정적 속으로 배들은 방향을 잃은 채 파도 속으로 휩쓸렸다. 순식간에 여러 척의 배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고 여기저기서 배를 찾아 달라며 통곡하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 파도소리, 울음소리가 음울하게 하늘 위로 메아리쳤다.

     

다음날 아침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왜 그랬는지  딴전을 피우는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가려진 그의 잔잔하고 평온한 얼굴이 무섭기도 했다.       

중솔나무의 허리에는 끊어진 밧줄이 힘을 잃은 채 늘어져 있었다. 움푹 눌러진 밧줄 자국에서 배들을 지켜내려 했던 시간들이 보였다. 모래펄 위에는 주인을 잃은 삶의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부의 삶이 녹아있던 배의 부서진 잔해들과 가족이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었던 깨어진 밥상, 모래펄을 뛰어다녔을 아이들의 신발까지도.........


지금도 고향에 돌아가면 길게 누워있는 방파제를 보곤 한다.바다를 가로막듯 얼기설기 쌓은 콘크리트 더미가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줄기차게 마을을 괴롭혔던 태풍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파도는 방파제에서 막히고 포구는 호수처럼 평온했다. 콘크리트에 자리를 빼앗긴 모래펄면적도 좁아졌고 아이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들 어디로 떠난 것인지  뒷전으로 물러선 중솔나무만이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믿고 의지했던 바다에서 받은 상처가 몹시 컸지만 사람들은 다시 배를 만들었고 끈질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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