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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Feb 11. 2022

가을과 어머니

고향을  추억하며

         

겨울왕국의 엘사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얼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가을에는 푸른 세상을 단번에 울긋불긋하게 바꾸는 단풍이 있었다. 

매년 가을이면 산촌은 마법에 걸린 듯 단풍으로 요란했다.

여름의 뜨거움을 밀어내듯 바람은 온도를 낮추었고 나무들은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었다.    

가을은 부지런히 산골짜기를 파고들어 나무마다 곱게 물을 들였다.

하루 하루 산을 바라볼 때마다 단풍은 잰걸음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왔고 나는 가끔씩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저들의 야단스러운 변화와 달리 나는 늘 제자리걸음하듯 서 있었고 멀리 바람처럼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나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던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그림처럼 떠오르곤 했다.

지금쯤 내 고향에도 가을이 왔을 텐데 너무 오래전에 떠나와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진다.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어릴 적 친구들이 생각나고 그들과 함께 뛰놀았던 좁은 골목이 떠올랐다.

바닷가로 향하는 좁은 길 양쪽으로 어깨를 맞댄듯한 담으로 이어진 골목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었고 우리들이 놀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골목에서 기다렸고 아이들은 어김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 중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거나 유별나게 큰 꿈을 지닌 아이들도 없었다.

공부란 단지 얼굴이 뽀얀 읍내의 모범생들이나  잘 사는 집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우리는 언제나 골목길에 갇힌 채 놀다가 해가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른들은 늘 바빴고 끝을 모르는 일에 힘들어했지만 우리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  너네들은  커서 무엇이 될 건지 참 걱정스럽다. ”

종종 우리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고 가끔씩 이유 없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지나치곤 했다.

어른들은 우리들의 앞날이 그들보다 나아지길 바랐지만 떼지어 놀기만 하는 우리를 볼 때마다 그런 기대를 버린 듯했다.     

그렇게 적당히 부모의 야단을 맞으며 커가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다가도 달려오는 단풍을 쳐다보면 문득 멀리 떠나고 싶은 외로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산 너머 마을에도 얼마나 붉게 물이 들었는지 달려가 내 눈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고 스멀스멀 땅거미가 찾아와도 구슬놀이와 딱지놀이는 쉬이 끝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골목에는 벌써 매캐한 연기가 차고 밥이 익어가는 냄새, 지글지글 임연수어가 구워지는 소리가 길가에 진동했고 꿀꺽 침이 넘어기도 했다.

그때 문득 건너편 산언덕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들이 귓전에 와닿았다.

"ㅇㅇ야! ㅇㅇ야! "

 ㅇㅇ야! 밥 먹어라 "

그 소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씩 좁은 골목을 길게 헤집고 들어왔다.

골목을 울리는 소리들은 분명치 않았고 간간이 스며드는 바람처럼 무심히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친숙한 듯싶었지만 낯설게 들리는 소리에 신경이 쓰였는데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여러 차례 부를 때마다 애써 화를 감추듯 높아지는 어머니의 소리였고 소리의 끝은 도대체 오질 않고 무엇하느냐고 꾸짖는 듯 뾰족했다.

들판의 가을걷이만으로도 종일 피곤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아홉 식구의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소여 물을 나르고 굼불을 때고......

아아! 그러고도 밥때조차 잊은 채 놀고 있는 나를 찾는 것이었다.

이 못난 나를 찾고 있는데도 나는 골목 놀이에 빠져 그 소리를 몇 차례나 놓쳤던 것이었다.

뒤늦게 어머니가 나를 찾고 있음을 깨닫자 갑자기 미안하고 반가운 마음이 왈칵 솟구쳤고 순간 손에 있던 모든 딱지를 내팽개친 채 골목을 빠져나와 집을 향해 달려갔다.

달리면서도 애타듯 들려오는 어머니의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어쩌면 어머니가 살아온 고달픈 인생의 그림자가 소리 속에 군데군데 섞여 있는 듯했고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엌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마주친 어머니의 얼굴에는 땀과 하루의 피곤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머니가 안고 있는 고생스러움과 피곤함, 오늘은 그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미안하고 죄송했다.

나를 힐끔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던진 말은 뜻밖에도 "" 배도 안 고프냐? 어서 밥 먹자!'’

그것이 나를 향한 말의 전부였다.

심한 꾸중을 들을 각오를 했고 혼 벼락을 맞아도 싸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웬일인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몹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니 피곤함에 지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고생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 이제 겨울이 와도 걱정이 없겠구나! ”

때마침 지붕에서 일을 끝내고 내려온 아버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되뇌었는데

큰 걱정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아버지는 낡은 지붕을 걷어내고 초가지붕을 새 볏짚으로 갈아입혔다.

천천히 둘러보니 놀랍게도 우리 짐은 마치 새 집인 듯 밝았고 집 안팎으로 신선하고 향긋한 풀 내음이 그윽했다.

가을걷이도 끝나고 겨울 준비도 단단하게 마친 상태라 정말로 어떤 추위가 와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마루에 둘러앉아 고소한 햅쌀밥을 오래 음미하듯 씹었다. 

햇밥에는 향긋한 가을의 냄새가 가득했다.

식구들은 말이 없었고 그날따라 그릇에 부딪는 수저들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들 사이로 서로를 향한 마음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언제든 익숙하게 들리는 소리, 자연스러운 침묵의 순간들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왠지 한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처럼 여겨졌다.    

앞산을 바라보니 열병이 번지듯 펼쳐진 단풍들이 아름다웠고 어쩐지 우리 집에도 좋은 일들이 쏟아져 들어올 듯했다.

바람이 불면 마당에 서있는 나무에서 잎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떨어지곤 했다.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저 붉게 물든 잎들처럼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더 깊어지는 것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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