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지만 기온은 한여름처럼 높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거리를 달릴 수 없다. 날은 흐리지만 에어컨을 켰다. 어쩐 일인지 1단에서 2단으로 올려도 그리 시원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
"강남하이퍼에 갔다가 나오면 나아 질지도 모르지...."
강남하이퍼를 점검하는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전기실을 들렀다가, 강의동에서 1층에서 4층을 다니면서 분전반을 열어 점검을 했다. 마지막으로 기숙사동으로 건너가 아랫층에서 위층까지 계단실 옆에 붙은 분전반을 열어 점검을 했다.
관리실이 있는 지하에 다시 들어가니, 금방 외출을 준비하는지, 강남하이퍼 관리실장인 강설중씨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과 팔뚝에 선블럭을 바르고 있다.
"어디 나가실려고요?"
"요즘 날이 더워서 조금만 햇볕을 쬐도 썬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안되요."
"그렇지요. 맞아요. 나도 아침마다 바르고 나와요."
"그나저나 날이 벌써 더운데 차에 에어컨은 잘 되요?"
강설중씨가 나다녀야하는 나를 걱정하는지 에어컨 상태를 묻는다.
"여름이 시작되자 냉매를 보충했는데, 지금 또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틀어 보니 시원치 않아요."
금방 여기에 오느라고 틀어 본 에어컨 상태를 말해 주었다. 위로인지 걱정인지 부드럽게 말해 준다.
"에어컨이라도 잘 되어야 할텐데...."
"예, 그럼 수고 하세요. 가보겠습니다."
그 새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구름이 걷혀서 그런지 날은 훨씬 무더워졌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우선 창문을 열어 뜨거운 공기를 내 보내고 에어컨을 4단으로 올렸다. 조금 있으면 나아 지려니하고 한참을 달렸다. 웬 일인지 에어컨을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뭐가 잘 못됐나? 1단부터 다시 틀어 볼까?"
1단에 놓고 한참을 달렸다가, 2단으로 놨다. 그래도 찬바람의 정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4단까지 다시 가도 영 마찬가지다.
"이거 에어컨이 또 문젠데....?"
자동차가 달릴 때는 그래도 바람이 들어 왔다가 차 내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조금은 시원하다. 그러나 신호등에 걸려 2,3분을 서 있어야 할 때는 그 시간이 왜 그리 긴지 모른다. 옆에 차가 창문을 꽉 닫고, 시커먼 썬팅으로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을 때는, 나는 더 덮다. 처량하기까지 하다. 여기저기 써금써금한 녹이 드러난 차에, 아직도 기어를 넣으며 타고 다녀야하는데, 에어컨까지 되지 않아 무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시커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 고스란히 맡아야하는 신세가 한없이 처량하다. 에어컨을 4단까지 왕왕 틀어도 소리만 요란할 뿐 찬바람이 없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야, 이거, 에어컨 냉매 주입한지 두 달도 안 되는데 또 카센타에 가서 돈 들여 냉매 주입한다고 그러면 사장이 뭐라 그럴까? 사장이 짠돌이라는데 선뜻 그러라고 할까?"
"그래도 그렇지, 한 여름에 에어컨 안 되는 차를 어떻게 타고 점검을 다니누?"
"이것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그만 둬야지, 방법이 없는 거지."
"그래. 하는 수 없다. 차는 벌써 22만km를 타서 써금써금해도, 새 차를 사 주고 점검을 하라고 해 줄 리는 없다. 나도 이런 차를 질래 타고 다니면서 점검을 다닐 수는 또 없다. 이걸로 타박을 하거나 뭐라고 그러면 내 그만 두고 만다, 말어."
회사를 그만 두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제 두 달 된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어디 사회생활을 해 먹겠나 싶다.
날은 한 낮이 되어서 해가 쨍쨍 난다. 이제는 달려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이 차안이 한증막이다. 즐겨 듣던 라디오도 소음이다. 남녀 두 앰씨가 서로 웃으면서 라디오를 진행해도, 그 소리가 즐겁지 않다. 채널을 돌렸다. 피아노 치는 소리도 유리창 깨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또 돌린다. 이번에는 구수한 남자의 목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또 길 가에 커다란 누렁이가 볼일을 본 걸 주인이 치우지도 않고 그냥 가버린 구린 소리가 난다. 이것도 아니다. 차라리 꺼버리고 말았다. 차 안이 더워서 짜증이 나니까 그동안 그렇게 즐겁게 듣던 라디오 소리도 모두 듣기 싫어진다.
양지에서 이천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 지는 몰랐다. 구비구비 골짜기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산은 내 앞길을 척척 막아선다. 두 금방 신호등을 지났는데, 신호등이 또 나타나고, 나타난 신호등은 금방 파란불에서 빨간불로 바뀐다. 또 서야 한다. 두 달 된 회사도 또 바꿔야 하는지, 자동차 에어컨이 내 길을 또 막는가보다. 다른 차들은 여유가 만만한가보다. 하기야 에어컨 잘 나오는지 창문을 꼭꼭 닫고 다니고, 안이 보이지도 않도록 썬팅을 새까맣게 하고, 밖에서는 들여다보지도 말라는 듯이 한 가닥의 눈길도 거부하고 있다.
구름을 새파란 하늘에 왜 저렇게 여유 있게 드문드문 떠다니는지 모른다. 내 차는 빠르게 움직여야 조금이라고 열기를 피할 수 있는데, 저 여유있는 흰구름은..., 그래 역시 딴 나라의 구름이다. 저, 저 먼 하늘의 구름이다. 드높은 산자락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있고, 그 위에 구름은 나와는 상관이 없이 여유가 있다. 가까이 산은 날 가로막고, 먼 구름은 날 외면하고 있다. 세상이 다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는 외계인이다.
오는 길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었다. 이 땡볕에 찜질방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도 먹을 수 있다. 이천로컬푸드와 마당을 맞닿아 쓰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오늘 아침을 호박죽 한 그릇을 간단하게 때우고 나왔으니, 일하는 중에 점심은 그래도 잘 먹어야 한다고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국은 뜨뜻해도, 에어컨은 잘 돌아가 시원하게 먹었다. 오늘 양치는 가까운 집에 들러서 하면 된다. 양치도 좀 여유 있게 하고, 점심시간에 갖는 휴식은 집에서 좀 쉬어도 가고, 아내는 집을 비우고 외출을 했을 테지만, 혼자서 차도 한잔 마시고 가자고 했다.
집에서 몇 분을 쉬어도 차 에어컨이 영 마음에 걸려서 쉬어지지도 않는다. 이제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어도, 사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보완을 해야 한다. 사장에게 문자를 넣었다.
"사장님, 에어컨이 또 잘 안 되는데, 금호카센타에 가서 점검을 받고, 필요하면 냉매를 추가 주입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내고 기다렸다. 문자를 기다리는 사이, 찜질방에서 쉬지도 못하고 긴장하고 화를 내는 사이에 피곤이 쌓였는지, 거기다가 점심을 막 배불리 먹어서 그런지 깜빡 졸았다. 졸다가 '띵동'하고 휴대폰에 문자가 오는 소리를 듣고 깼다.
"금호 카센타에 가서 A/S를 받으세요."
"예."
그렇다. 이제 두 달도 안 지났으니, 돈을 주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에프터서비스구나. 역시 사장은 다르다. 이걸 A/S로 처리할 궁리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시 길을 나서는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 않다. 여기서 다시 2,30분을 운전해 카센터까지 가는 길은 좀 덥더라도, 사장이 다시 고쳐 시원하게 탈 수 있는 방안을 선선히 내 주었으니 말이다.
"그래, 좀 덥더라도 카센터까지만 가자."
집에서 출발해 큰 길에 들어서려고 신호를 대기하느라고 기다리는 중에 에어컨을 다시 주물렀다.
"어? 이런, 여기 에어컨 버튼을 안 눌렀네?"
에어컨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와야 에어컨이 작동이 되는데, 여태 그걸 누르지 않고, 에어컨 단수만 높였다. 이걸 아무리 주물러야 찬바람이 나올리 만무하다. 오른쪽에는 히터불이 들어 오고, 왼쪽에는 에어컨 불이 들어와야 하는걸, 지금까지 이걸 누르지 않아서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에어컨 버튼을 누르자 금방 찬바람이 나온다.
"그럼, 그렇지. 찬바람이 나오는구나. 이제 좀 살만하다."
아까 강남하이퍼에 들렀을 때 강설중 관리관이 에어컨 걱정을 하는 바람에, 차는 이미 고물이고, 여직 스틱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 걱정이 바로 이입되어, 이 차는 그렇게 에어컨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그랬는지, 잘 되는 걸 안 되는 줄 알고 여태까지 왔다.
"아이고, 잘 되네, 잘 돼."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천에서 여주로 가는 길은 큰 산이 없다. 용인에서 이천까지 오는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비산비야다. 산처럼 솟았지만 산도 아니다. 작은 언덕이다. 평평한 들도 아니다. 작은 언덕에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 초록색 나무 숲 위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어떻게 저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아마도 파란 하늘이 구름을 품고 있는 것일 게다. 어떤 구름은 아래가 시커멓게 보이도록 덩치가 크다. 그 큰 것도 저렇게 가볍게 떠있다. 자동차 안에 시원한 바람이 세게 나오니까 내 마음도 구름을 따라 둥둥 떠서 날아간다. 구름도 아까의 구름과는 다르다. 전혀 다르다.
언덕마다 어김없이 집이 몇 체씩 있다. 전원주택이다. 저 집 안에서 내다보면 하늘이 잔뜩 들어 있을 것이다. 높은 언덕 위의 집처럼 초록색 들판이 끝도 없이 넓게 보이고, 저 멀리 언덕위로 붉은 해가 떨어지는 것도 보일 것이다. 앞에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한 10년 전이다. 내 친구 원제가 여주에 땅을 사서 전원주택지로 만들어 분양을 한다고 했다. 그때는 여주에 갈 일이 별로 없어서 여주의 지형이 이런 줄 몰랐다. 비산비야의 작은 언덕을 하나 산 모양이다. 지목을 변경해 터만 닦으면 어디고 전원주택지로 훌륭하다. 강천에서 여주의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고 했다. 이런 날씨에는 막힌 곳 없이 탁 트여, 저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그림처럼 즐길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원제는 아마 그 터를 오래지 않아 다 팔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그 땅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여주로 들어서면서 탁 트인 하늘이 멀리까지 보인다. 마치 내가 회사를 좀 더 오래 다녀도 될 모양이다. 이런 차를 타고 점검을 가는 데는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라디오를 틀었다. 아까는 나오는 프로그램마다 듣기 싫도록 짜증이 났는데, 이 라디오가 그 라디오가 맞나 싶다. 내 차도 옛날 차지만 선팅은 잘 되어 있다. 법인차 중에 썬팅 하나는 잘 된 차다. 썩은 것은 제일 썩었지만, 다른 차는 신문지를 뒷자석에 아주 늘어트리고 다니는 차도 있다. 다른 차는 에어컨 필터를 끼울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내 차는 에어컨 필터도 갈았고, 썬팅도 잘 되어 있지만, 겉모양은 더 낡아 보인다. 차 세 대가 하나씩 좋은 것을 나눠 가졌다. 나쁜 것도 하나씩 있다. 그 중에 내 차는 요즘 나온 다른 차와 비교해도 썬팅은 잘 되어 있어서, 지금도 문 꼭 닫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외부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게 즐거운 라디오를 듣고 있다. 오후의 졸음을 확 쫓아버릴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상국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퀴즈를 낸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무조건 긍정하는 동물은 무엇일까요? 퀴즈 정답자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에 정답을 공개한다.
“오늘 퀴즈의 정답은 돼지였습니다. 돼지, 그럼요, 돼지. 다 돼지.”
"그래. 맞아. 뭐든지 긍정하는 동물은 돼지구나."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이 내비게이션에 카센터를 지우고 다음 점검회사인 (주)명성을 입력했다. 명성에는 수변전실이 실외에 있다. 주차장 가에 H형 전주 위에 ASS가 있고, 그 아래 MOF가 있고, 그 아래 TR이 있다. 바닥에는 저압 판넬이 있는데, 거기서 주요한 것을 보면 된다. 땡볕에 나가야하지만, 이미 차에는 아들이 15년 전에 말레이지아에서 사다 준 카우보이 모자가 있다. 그 모자를 쓰고 나가면 땡볕은 피할 수 있다. 썬그라스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후크메타를 들고 점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