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임자 김명섭씨와는 한 주간도 함께 다니지 못했다. 한 달에 한번 가는 곳이 대부분이고, 한 달에 두 번 가는 곳이 열 군데는 되고, 한 달에 세 번을 가는 곳이 여섯 군데, 한 달에 네 번을 가는 곳이 한군데다. 모두 합하면 120곳을 다녀야 한다. 전임자와 다닌 곳은 1/4도 안 되는 셈이다.
전임자는 일단 수용가에 가면 가방 먼저 둘러맸다. 전기를 점검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담은 가방이다.
“일단 수변전실에 도착하면 가방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절연 장갑을 끼는 겁니다. 판넬을 열 때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판넬 안을 보지 말고, 얼굴을 외면하고 여세요. 판넬 안에 충전되어 있던 전기가 얼굴에 직접 맞을 수가 있어요....”
점검을 하러 처음 갔을 때 초보자에게 일러주는 말이다. 나는 듣고 고양이 걷듯이 조용조용 천천히 움직였다.
“전기쟁이는 빨리 움직이지 않아요. 대신 생각은 빨리 돌려야 해요.”
몸은 나무늘보처럼 움직여도 생각은 팽이 돌듯이 팽팽 움직여야하는 모양이다. 몸은 보이는 길을 따라가지만, 머릿속에 생각은 보이지 않는 전기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기가 어떻게 흐를까, 어디로 흐를까, 얼마나 흐를까, 이걸 조작하면 어떻게 될까?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는 장비 이야기를 했다. 그도 처음 왔을 때 그의 전임자에게 장비에 대해서 들은 것을 이야기 한단다.
“먼저 가방을 샀어요. 거기다가 전기 점검에 필요한 장비를 넣어야 하잖아요. 뭐, 소소한 것이 다 들었어요. 후크메타에서 메가, 활선테스터기, 온도 측정기는 기본이에요. 안전모도 사야하고요.”
이뿐이 아니란다. 드라이버에, 드라이버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 일자는 물론, 별표 드라이버, 6각랜치까지, 뭘로 잠겨 있든지 다 열 수 있어야 한단다. 전기 판넬이 아니라, 특히 태양광 인버터 판넬을 열려면 말이다.
“몽키도 있어야 해요. 접지저항을 테스트할 때 열어야 하고, 콘덴서를 갈 때도 필요해요.”
가방을 들어 보니 제법 묵직하다. 쇳덩어리 여러 개가 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 무거운 가방을 명섭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러 멘다. 판넬 앞에 도착하면 또 무거우니까 제일먼저 하는 일이 가방을 내려놓을 적당한 장소를 찾는 일이다.
전임자를 따라다니기를 이틀을 한 다음에, 사흘째부터는 가방을 내가 메겠다고 했다.
“오늘은 내가 가방을 멜게요.”
이틀을 운전을 하면서 나를 데리고 다녔지,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가 넉 달 동안 일했던 노하우를 세세히 다 가르쳐 주고 있지, 밥 먹을 때면 밥집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며 혼자 먹을 수 있는 밥집을 앞장서 찾아 다녔다. 사흘째 되던 날은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침부터 가방은 내게 메겠다고 했다. 제법 묵직하다.
“오늘은 영화상측정을 해 볼 거구요, 절연저항기와 접지저항기도 가지고 나갈게요.”
명섭씨는 측정장비를 손에 들었다. 열화상측정기, 절연저항계, 접지저항계를 양 손에 챙겨 들었다.
보통 점검이 끝나면 싸인을 받아 한 장씩 나눠 가져야 한다. 수용가는 점검을 받았다는 근거고, 안전관리자는 점검을 했다는 근거를 서로 남기는 절차다. 싸인을 할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멀리 찾아가야 하는 곳도 있다. 점검을 할 때 싸인을 할 사람이 점검하는 동안 따라 다녀서, 점검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싸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아주 멀리 찾아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K2 코리아는 한참을 찾아가야 한다. 우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담당자를 찾아가 수변전실 열쇠를 받아야 한다. 열쇠를 가지고는 물류창고 반대편 건물의 지하 수변전실까지 가야 한다. 이때도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 낯선 장소고, 물류창고니까 지게차도 다닌다. 불쑥 튀어나올 것을 예상하고 천천히 다녀야 한다. 어깨는 무겁지만, 발걸음은 느리다. 발걸음은 느리지만, 머릿속에서는 만나서 열어야할 전기 통로를 계산하느라고 생각은 빠르게 돌아간다. 가방을 내려놓고 점검을 하면 싸인을 받고 열쇠를 넘겨주려고 또 물류창고를 가로지르고, 지하2층에서 지상3층까지 사무실을 찾아 가야 한다. 가방을 둘러멘 어깨가 자꾸 올라간다.
한 주간을 둘이 다니면서 가방은 늘 메고 다녔지만, 가만 보니, 그동안 꺼내서 쓴 장비는 세 가지뿐이었다. 활선테스터기를 손목에 찼다. 판넬을 열 때마다 삐삐 소리는 낸다. 온도측정기로 변압기 온도를 한번 측정했다. 가장 많이 꺼낸 것은 후크메타다. 가는 곳마다 이것은 여러 번 사용했다.
그가 일주일만 내게 인계를 하고는 그 다음 주부터는 나오지 않았다. 인수인계를 한 달을 잡았는데, 후임자를 찾을 수 없어서, 그만 두기로 한 날짜를 일주일도 안 남기도 내가 입사를 한 것이다. 당장에 들고 나갈 장비를 살 수 없어서 임시로 회사의 사장님 후크메타 하나만 빌려 들고 첫날 점검을 나갔다. 후크메타 하나만 들고 다닐 때는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장비를 다 구입하는 데는 열흘도 더 걸렸다. 가방도 장만했다. 아내가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가방을 하나 받아서, 신발장 서랍에 있던 도구를 챙겨 넣었다. 드라이버, 전동드릴, 뺀찌, 립빠, 전기 기능사시험을 볼 때 쓰던 활선테스터기와 스트립퍼, 만능 스페너까지 넣었다. 엊그제 택배로 온 메가와 후크메타까지 주머니주머니 종류를 구별해 넣었다. 이것도 제법 목직하다.
이제는 내가 내 가방을 제대로 갖추어 메고 점검을 다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문을 열고 가방을 둘러멨다. 손에는 절연장갑을 끼고 볼펜과 점검기록표를 집은 파일을 들었다. 처음에는 똑바로 서서 가방을 메고 다녔지만, 제법 먼 거리를 다녀야하는 수용가에서는 마치고 차로 돌아올 때는 어깨가 상당히 많이 올라간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방 밑바닥에 깔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페너같은 쇠덩어리가 밑구녕으로 쑥 빠져 치렁치렁해서 엉덩이를 치니, 출렁일 때마다 가방 끈이 늘어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번은 써니빌 마을에 도착했다. 동막골처럼 사방으로 초록색 나무만 보이고, 그 위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하얀 구름을 품은 파란 하늘만 펼쳐져 보이는 동네다. 차 소리도 안 나고, 사람 소리도 없고, 짐승 소리는 아직은 숨었다. 입구초자 수풀에 가려져서 싸리함지 같은 동네다. 전선은 모두 땅속으로 묻었는지 전봇대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짓지 않는 집터가 여러 개가 파란 풀로 덥혀 있다. 별장으로 분양하는 이 마을 한쪽 가에 콩색 울타리를 치고 전기를 받는 곳이 있다. 전기 점검을 하려면 차를 멀리 대고 수풀을 헤치고 200m는 걸어가야 한다.
수변전실을 가려고 무거운 가방을 메려다가, 퍼뜩하고 머릿속에 불이 하나 들어왔다. 차 문을 열다가 잠깐 멈추어 생각을 했다.
“이런 장비들을 매번 점검을 할 때마다 다 메고 다녀야할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일주일을 넘게 가방을 메고 다녔지만, 가방에서 꺼내 사용한 장비는 불과 세 가지뿐이다. 후크메타, 활선테스터기, 온도계다. 후크메타는 전압과 잔류를 측정하는데 써야하고, 활선테스터기는 판넬을 열 때 어디까지 고압에서 나오는 자기장이 미치는지 알고 그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있어야 하고, 온도계는 고압 ASS, MOF나 변압기에서 삼상의 온도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려면 있어야 하는 장비다. 이건 점검에 꼭 필요한 장비다.
그러나 그 외에 가방에 무겁게 든 장비들은 이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가져가면 되는 장비들이다. 차에다 뒀다가 이상이 발생하면 다시 와서 가져가도 늦지 않다. 당장 불이 나서 소화기를 쏘듯 시간을 다투는 일도 아니다. 드라이버가 없다고 점검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몽키스페너를 지니지 않았다고 배전반 판넬을 못 여는 것도 아니다. 이런 건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 대처나 수리에 필요한 장비들이다. 굳이 몸에 지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가방을 메고 가지 말아 보자.”
가방에서 점검에 꼭 필요한 장비들만 꺼내서 주머니에 꽂았다.
앞뒤로 바지 주머니에 장비를 챙겨 넣었다. 오른 손에는 볼펜과 점검기록표를 들고, 왼손에는 후크메타를 두 선을 추려 들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점검에 필요한 장비는 다 든 셈이다. 한전계량기에서는 18번에서 21번까지 보면, 현재전력과 최대전력과 우리 같은 점검자가 중요시 여기는 역률을 읽으면 된다. 육안으로 케이블 체결상태와 열화나 탄화가 발생한 것이 있는가 보면 된다.
“어, 보자, CH 괜찮고, PF 이상 없고, MOF는 과열되지 않나? 변압기는 3상의 온도가 일정한가? 콘덴서는..., SPD는..., ASS 밧데리 전압은 24V 이상이고, 발전기 밧데리 전압도 이상 없는가?....”
이제는 뜨거운 여름이 됐으니 혹시나 과열되는 곳이 있는지 온도를 측정한다.
아, 이러면 됐지, 지금까지 왜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녔을까? 그러고 보니 5시경에 사무실을 들어가면 다른 곳에 점검을 하는 이대엽 과장은 조끼 주머니에 후크메타를 넣고 다닌다. 현장에 나가서도 저렇게 다니는 모양이다. 출퇴근을 할 때는 배낭을 메고 다니지만, 점검을 할 때는 저 큰 배낭을 메고 다닐 리는 만무하고, 조끼를 입은 채고 후크메타만 들고 다니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점검할 때 후크메타만 그렇게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그럼,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니껴?”
경상도 사투리가 투박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비를 깡그리 던져버릴 듯 거칠게도 보인다. 그럼, 왜 지금까지 김명섭 부장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녔을까?
나도 김명섭 부장이 가르쳐 준대로 점검기록표 제일 끝에 내 싸인을 해서 점검자를 기록하기 전에, 그 앞에다가 전화번호를 적었었다. 김부장과 처음 함께 간 날 가장 먼저 작성하던 기록표를 작성하면서 말했었다.
“나는 내 이름 앞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요.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하라고요.”
“그래요? 맨 아래 회사 전화와 주소와 팩스도 다 기록표에 인쇄가 되어 있는 데도요?”
으레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명함도 관리자가 바뀌면서 일일이 전달하면서 건넸는데도 일일이 전화번호를 적었다. 아마도 그 무거운 장비가방을 일일이 메고 다니는 것도 점검기록표에 자기 전화번호를 적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전화번호를 적는 것이,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먼저 전화를 해 주세요.”
하는 뜻이라면, 장비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제가 이 무거운 장비를 메고 왔습니다. 나를 좀 측은히 여겨 주세요. 싸인을 할 일이 있으면, 꼬투리 잡을 생각을 하지 마시고, 선선히 싸인해주십시오.”
하는 마음 말이다. 이게 아니라면 뭘까? 이런 것이 있나?
“이 큰 가방의 장비를 챙겨서 다녀야만 전기를 점검할 수 있을 만큼 전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지 마시고 순순히 싸인이나 해주십시오.”
하지는 않을까?
어쨌든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지 않기로 했다. 장비는 가방채로 차에 두고, 몸에 지닐 수 있는 것만 들고 다니기로 했다. 후크메타와 활선테스터기와 온도계면 된다. 몸 하나 달랑 가면 되니까 그것만도 날아갈 것 같다. 각종 장비를 몸에 지니려면 주머니 여기저기에 꾸깃꾸깃 쑤셔 넣기는 해야 하지만 말이다.
가루영웅은 빵집이다. 저압을 받아서 쓰지만 다중이용시설이라서 안전관리자가 정기점검을 해야 한다. 이달치 점검을 하고 싸인을 받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부른다.
“저기, 부장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뭡니까?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여기 매장에 콘센트를 하나 없애 주실 수 있어요? 손님이 여기에 컴퓨터를 꼽고 쓰다가 ‘팍’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나더라고요.”
“그래요? 제가 한번 볼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차에 가서 장비를 가져올게요.”
점검장비만 들고 왔으니, 수리할 장비를 다시 가서 가져왔다. 찻길 건너편 빵집 전용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가서 장비 가방을 통째로 들고 왔다. 분전반에 가서 콘센트에 해당하는 누전차단기를 내리고 콘센트 뚜껑을 열어 전선을 분리했다. 역시 전선이 검게 그을렸다. 어떤 부위는 전선이 녹아 구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여기 콘센트를 없앨 생각을 잘 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누전차단기가 내려가지 않았을까요? 누전차단기가 고장이거나, 너무 높은 전류가 흐르는 차단기를 사용한 것 같아요.”
“뭐, 고칠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아주 없애 주세요. 손님이 쓴다면 막을 수는 없지만, 아주 쓸 일이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매장으로는 더 좋아요. 우리 매장은 전기까지 쓰면서 장시간 머무는 손님은 사절이거든요, 사실은.”
그래서 콘센트를 아주 분리하고 선을 이었다.
콘센트에는 대부분 선이 네 개개 들어간다. 제일 끝에 있는 것은 두 개지만 말이다. 두 선은 전기가 오는 선이고, 두 선은 다음 콘센트로 보내주는 선이다. 두 선이 전기가 오는 선이라지만, 사실은 한 선만 활선이고 다른 선은 중성선이라서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활선 하나와 중성선이 연결되면 전기가 흘러 220V의 전기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콘센트는 쓰지 않지만 다음 콘센트로 보내 주려면 활선은 활선끼리 묶고, 중성선은 중성선끼리 또 묶어 줘야 한다. 전선을 묶는 것을 보고는 빵집 주인이 깜짝 놀란다.
“콘센트에 전선을 묶으면 또 ‘퍽’하지 않아요?”
“아니에요. 여기는 안 써도 다음 콘센트는 써야 하잖아요. 다음 콘센트로 보내 주는 거예요.”
그제서야 안심한다. 그래 모르면 그럴 수 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걸 전기기사는 그걸 좀 안다고 안전관리자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거면 된다. 내 성심껏 보살펴 주고 점검을 하면 된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된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도 된다. 모르는 것은 가리켜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가볍게 다니기로 했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게 다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