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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Nov 19. 2023

강릉 이주기

강릉, 떠돌이 삶의 마침표

사실, 우리는 아이가 돌 무렵이었을 때에도 동해안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때도 역시 미세먼지 때문에 그런 결심을 했었는데, 주변에서의 반대로 우리는 포기했다. 남편의 직장에서는 남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였고, 부모님을 비롯한 친구와 지인들은 미세먼지 때문에 지방(시골)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런 냉소적인 반응들 속에서 나는 내 삶의 결정권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갈팡질팡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에게 요동치는 마음들이 일시적인 것인지, 순간의 감정들에 치우친 것인지 자꾸 의심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미세먼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런 시간 들을 후회한다. 주변 목소리에 흔들렸던, 후회할까 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신 없어 했던 나의 모습을 후회한다. 조금 더 일찍, 그때 왔었으면 더 좋았을 걸 생각이 든다.     


이주 결심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으로 와서 1박 2일 동안 집들을 알아보았다. 

네이버 부동산을 통하여 집을 알아본 후 열 군데 정도로 추슬러 직접 보러 다녔다.

자금도, 정보도 제한적인 우리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경기도에 살 때에는 30년 정도 된 노후 된 아파트에 살았으니, 이번에는 신축으로 선택하고 싶었다. 그리고 되도록 1층에 살고 싶었다. 

회산동부터 교동, 입암동, 포남동까지 집을 보러 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집을 알아보느라 지친 남편과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예전에 미대촉카페 (미세먼지 대책을 촉구합니다-여기 카페에서 나는 열심히 활동했었다.) 에서 내심 부러워하며 읽었던 글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보았다.

미세먼지를 피해서 강릉으로 먼저 이주한 분이 쓰신 글이었는데 본인이 사는 동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놓은 글이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바로 그분이 소개한 홍제동 아파트의 매물을 찾아보았고, 운 좋게도 필로티 2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선 이틀 연속 그곳 아파트를 보러 갔었다. 동향인 게 살짝 아쉽긴 했지만 지은 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별다른 수리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고, 지대가 높아서 2층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뷰를 가지고 있어 막힘이 없고 답답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기가 내 집이구나 싶었다.  


강릉 집을 계약했다. 전셋집에만 살아봤지, 내 집은 처음이었다. 내 집이 생겼다. 그것도 강릉에. 야호! 

서울 잠원동 투룸에서 시작한 신혼생활부터 아이가 생기면서 더 넓은 집이 필요해 이사 가게 된 경기도 군포 산본까지. 집값에 쫓기며 늘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했던 내 집 마련의 꿈이 이루어졌다. 그리 넓지는 않아도 우리 세 가족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강릉에 생긴 것이다. 그렇게 강릉은 고맙게도 우리 가족의 떠돌이 삶에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강릉 집을 계약하고 경기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촉이 좋다. 그날도 무언가 느낌이 있었던 걸까? 어떻게 그 시간에 딱 맞춰서 전화를 했을까?

“엄마, 나 집 샀어.”

“집은 무슨 집? 네가 돈이 어딨다고? 로또라도 된 거야?”

“응. 내 인생에 로또 같은 첫 집. 강릉에 집.”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주말에 너희 집으로 갈게. 만나서 이야기해.”     


서울에 사시는 부모님은 주말마다 경기도 우리 집에 자주 오시곤 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를 보기 위해 매주말마다 우리 집을 찾으셨다. 부모님의 첫 손주인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는 부모님의 인생 즐거움 그 자체가 되었고 활력소가 되었다. 내가 강릉으로 이사를 가면 아이의 재롱을 자주 못 보게 될 테니 부모님은 엄청 서운하셨을 것이다. 


주말이 되어 만난 부모님은 서운함과 걱정 때문이었는지 한숨부터 쉬시며 이야기하셨다. 

연고도 하나 없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 거냐고. 왜 상의도 안 하고 섣부른 결정부터 한 거냐고. 이런 부모님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기에 나는 조근조근 대답하였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고 가는 거라고. 우린 아직 젊으니까 어떻게든 살아질 거라고.

망해도 괜찮으니까 일단은 가서 그냥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우리를 믿지는 못해도 걱정은 마시라고. 

이제는 더 이상 나의 결정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으신 부모님은 체념하신 듯 알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2019년 5월에 강릉으로 왔다. 그리고 3년 가까이 강릉에 살고 있다.

이사를 하고 이삿짐 정리가 얼추 끝나고 맞는 어느 느긋한 아침, 아침 식사를 하며 평소처럼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를 들으려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그런데 아무리 주파수를 맞춰봐도 아저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는거지? 아, 그제야 깨달았다. 지역방송이 나오고 있구나. 


아, 여긴 강릉이구나. 내가 강릉에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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