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간 다움과 그 시기 인문학이 탄생한 이유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바로 암흑시대에 빛을 가져오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데, 다시 태어난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었다. 마침내 신과 그것의 본성을 다루는 신학 대신 인간다움과 그것을 숙고하는 인문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이 중세기재 기독교의 세계관을 뚫고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양 근대 사회의 인문학은 인간을 넘어서는 일체의 초월적 가치들에 대해 일정 정도 회의적인 자세와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 초월적 가치가 종교이든, 정치권력이든, 아니면 자연의 힘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만약 지금도 인문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의 편에 서겠다는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떄문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권위에 종속된다면 인문학은 더 이상 살아 있다고 스스로 이야기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철학 대 철학』강신주
인문학 정신은 말 그대로 서양의 자본과 제국주의 그리고 물질 문명을 거부하는 정신이다. 불교 역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인문학자는 자고로 인간 스스로 인문학적 정신을 가지고 살길 바란다. 불교 역시 정신의 주체를 '신'에게 맡기지 말라는 종교이다.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속여되는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타자가 건네는 어떤 말에도 속아서는 안되고 '인문'이라는 말 그대로 자신의 문양을 뽐내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살것을 바란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그건 우리가 예술가들을 존경하는 이유기도 하다. 문학, 철학, 예술 작품에서 자신만이 낼 수 있는 고유의 언어나 표현 방식으로 주체성을 내기 까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자의 마음을 읽는게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나와 타인의 정서가 완전하길 스스로 지향하는 것에 있다. 관계가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라캉 《세미나》에서도 말하듯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현재 사는 삶은 언제나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간극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자의 소명이다. 힘들어도 여기 머물지 말고, 신의 뜻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말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택하고 행동을 취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꿈을 향해 꼭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확고부동한 중심이 있어야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의 선언에도 알 수 있지만 종교는 억압과 착취이며 맹목적인 숭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20세기 반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은 사이비 인문학 혹은 수정주의 인문학자들을 등장시킨다. 인간의 자유를 흉내내는 교회는 끝내 '신'을 들먹인다. 그리고 마치 한국의 입시 제도 처럼, 어떤 제도 안에 들어 인간의 순위를 매기고 어떤 욕망이나 정신을 한 잣대로 세워 들먹인다.
정치적 경제적 권위에 맞서 신에 의지 하지 않으려면 어떤 고독 상태에도 그것이 불완전 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다라고. 이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라는 선례라는 점, 더욱이 그럼에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국민 전체라기보다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기 떄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진리성이 유효하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 《방법서설》, 데카르트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 《수상록》, 몽테뉴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에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즉 일반적으로 양식 혹은 이성으로 불리는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천부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 《방법서설》, 데카르트
여기서 순수한 정답으로써의 '코기토'를 말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질문에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까? 사람에 따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사실임에도 왜 기독은 하나의 정답이 옳다고 말하고 이를 강요하는 지 알 수 없다. 성찰의 데카르트 에서도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나는 존재하고, 사유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이성에 대한 존재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존재가 타인이 규정한 존재로써의 하나의 양식으로만 존재한다면, 어떤 자신의 생각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자 하는 말이기도 하다.
파스칼은 '인간은 외부로부터 칭찬 혹은 찬양을 받으려고 갈망하는 존재'라고 한다. 이로 인해 허영의 논리를 주장한다. 파스칼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허영의 노예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활동을 하기도 한다. 사랑받고 싶고, 존재성을 입증하고 싶은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살다간 전체를 보면 우리는 더이상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 허영덩어리인 자신은 파스칼의 피학증에 놓은 하나의 노예로써 삶을 살게 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