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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Jan 11. 2023

아퀴나스와 오컴에 대한 이야기

보편타당이란 무엇일까, 과연 '보편'은 존재하는 걸까





실재론과 유명론의 개념이 있다. 실재는 말 그대로 지시 대상이 있는 현존하는 대상으로 부터의 개념을 세우는 것을 말하고, 유명론은 이름을 붙였기에 존재성을 가진다는 개념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편자'가 기준이 된다. 보편자를 중심으로 사물과 인물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보는 것에 있다. 실제론 경향으로는 존재 근거를 바탕으로 두므로 모든 개별자를 '에이도스'라고 부르며 그 자체를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론에 들어와서는 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왜냐면 다양한 명제와 이론이 증가하는 가운데에는 당연히 사람이 주장하고자 하는 '개념'이나 '의미' 또는 수많은 의도들이 들어서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인간의 개념이 핵심이기 떄문이다. 여기에는 서양철학이 앞서며, 동양 철학은 조금더 '실재성'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물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집착'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대한 집착을 말하기도 하며 이는 서양철학과 유명론을 멀리하는 것이 연관되어 있다. 


근대 철학의 실재론은 주체 바깥의 객관적으로 독립되는 사유의 경향성을 본다. 관념론과 대립되는 것이다. 관념론이란 어떤 물체나 대상이 의식 없어서는 존재하지 않는 다고 보는 철학인데, 이는 근대철학과 유명론과 연관된다. 


중세 철학에서는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 논쟁이 팽팽하다. 하지만 이는 언어 철학적 논쟁이 아닌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아퀴나스'와 '오컴'을 대두로 시작하는 주장이다. 쉽게 말해 아퀴나스는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이란 것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미리 태어난 자식도 인정되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오컴은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 앞에 태어나지 않는 자식은 '존재하지 않는 생명'으로 간주하는 것에 있다. 


이로써, 오컴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사유재산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혁명적 입자을 피력한다.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번성한 해방 신학의 성격과 닮았다. 기독에서는 신이 유일한 아버지이며 가짜 아버지나 어머니를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을 두고 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기에 속상함을 느낀다면 '죄'로써 존재를 두고 문제시 되고 있다.


신의 뜻에 따라 해방된 논리로써 우리는 오컴의 철학적 관점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이 주신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민중 의식은 기득권의 논리에 대두된다. 즉 자살이나 자신의 위해적 행동이나 생각이 오로지 이해나 타협되지 못한다는 점. 그런 점에서 오컴의 눈에는 신이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던 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보편자는 신이 만든 실재다." 라는 명제로 하여금 신 안에 수렴되는 규칙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것을 문제시 삼는 자가 없었다. 아퀴나스가 '무로부터의 창조론'을 그토록 논증하려고 애썼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어떤 사물이 만들어짐이 '신'의 의도에 대한 이유에서라면 존재한 모든 생명들은 그들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라는 점. 그래서 "존재자들 중 존재 전체의 보편적 원인인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논리적인 입증을 거치지 않은 말에 해당하는 사물을 그대로 믿으라는 폭력에 가까운 것이다. 아퀴나스의 진리관이 사람들을 속이고 노동의 존재로써 인간이 귀의되는 역사가 길게 이어져 왔고, 사람들은 신학에 대한 모든 사실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마저 보이지 않는 신에게 의탁해야만 했다. 


아퀴나스의 실재론은 신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무시하고 무제약자인 하느님을 선택한 것. 이로써 완성된 인간이 되길 선택한다면, 그들이 말한 '완성된 인간'은 무엇일까? 도덕적임을 주장하면서 수많은 종교적 논쟁으로 전쟁을 일으킨 지난 역사는 타당한 것일까?


오컴은 하느님의 전능을 강조하면서 개체들의 창조에 대해 개입한다. 하지만 개체들의 삶에 대해 관여하는 순간 그들은 신에 의해 살아가는 삶만큼 정신도 마음도 육체도 의탁되어진 채 살아가고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괴리감에 허덕혀 결국 하느님의 전능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아프고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말하듯 "마음이 많이 아프지"라고 말한다. 그런 주입식 생각을 스스로가 하면서 스스로를 처연하게 만든다. 기독사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사상의 도입으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겨 무기력한 양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순에 있다. 자신의 삶에 보편자라는 주체를 두는 순간, 삶은 계속 검열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눈치와 검열속의 삶에 계속 살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혼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속에 있더라도 말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위상과 능력에게 의탁하는 삶. 결국 그 이데아가 죽은 후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인간은 의지하며 순수해지길 원할까.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검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산다면, 어떤 인간상이나 의미나 목적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는 데 말이다. 모든 순수와 순정에 대한 판결과 편집증세는 기독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며, 사람의 정신을 빼앗는다. 이를 '오컴의 면도날'의 주장 즉 "다수성은 필연성 없이 설정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말살 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럼 말하고 싶다. 행동하라. 주체적으로. 누가 뭐라든. 그것에 최선을 다한다면,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신이 아닌, 자신이 '보편자로써 주인이 되는''자신이 부처임을'증명하는 행복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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