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동화] 수상한 시간부자 - 베르그송, 칙센트미하이, 실존주의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딸의 스케줄표는 어지간한 직장인의 것보다 빽빽하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의 퇴근 시간까지 빡빡한 스케줄을 감당해야 한다. 차라리 한 곳에 길게 머물렀던 유치원 시절이 나았다. 초등학생의 '돌봄'은 여러 학원을 조각보처럼 이어 붙여 완성되는 고난도 퍼즐이었고, 아이는 학교 방과후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로, 다시 태권도로, 또 수영 학원으로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했다. 하루는 아이가 현관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는 꼭 쳇바퀴 도는 햄스터 같아."
그런 아이에게 유일한 숨통은 금요일 저녁에 있는 필리핀 선생님과의 화상영어 수업이다. 그 시간만큼은 공부가 아닌 놀이처럼 즐겼다. 그날도 아이는 수업 5분 전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내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현지 인터넷 사정으로 수업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아이에게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컴퓨터가 고장 나서 오늘 수업 못한대."
아이는 1초 정도 아쉬운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텅 비어버린 한 시간의 가치를 즉각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활짝 펴며 외쳤다.
"엄마! 저 갑자기 시간부자가 됐어요!"
'시간부자'. 아이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그 단어는 꽤 흥미로웠다. 부(富)라는 것이 꼭 물질에만 한정되는 개념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날 오후, 아이는 새로운 질문을 들고 왔다. 아까 얻은 '부유한 시간'을 친구와 노는 데 썼는데, 그 한 시간이 10분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전 10분 동안 푼 수학 문제지는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아이가 물었다.
"왜 신나게 놀 땐 시간이 빨리 가? 시간은 누구나 똑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도 결론은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도하의 하루는 팽이보다 더 핑글핑글 돌았다. 월요일은 피아노, 화요일은 수학, 수요일은 논술, 목요일은 미술. 학교가 끝나도 쉴 틈 없이 학원 가방을 메고 뛰어야 했다. 꼭 쳇바퀴를 뺑뺑이 도는 햄스터가 된 기분이라, 도하는 가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옛날에는 실컷 놀았는데……."
도하는 책상 앞에 앉아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나마 금요일에 하는 필리핀 선생님과의 화상영어 수업은 도하가 유일하게 재미있어하는 시간이었다.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선생님과 깔깔거리며 대화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오늘은 바로 그 즐거운 화상영어 수업 시간이다.
도하는 컴퓨터 앞에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화면이 켜지는 대신, 엄마 휴대폰이 "딩동!" 하고 울렸다.
"어머, 도하야. 필리핀 선생님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 나서 오늘 수업은 휴강이래."
"네? 진짜요?"
도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미있는 수업을 못 하게 되어 딱 1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텅 비어버린 한 시간. 숙제도, 공부도 없는 완벽한 자유 시간이라니!
도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엄마! 저 갑자기 시간부자가 됐어요!"
'시간부자!' 스스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왠지 근사하게 들렸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인데, 시간부자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겠지?
그날 오후, 도하는 시간부자의 비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제일 친한 친구 지우와 놀이터에서 보낸 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마치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가벼워서 입에 넣자마자 녹아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 전 풀어야 했던 수학 문제지 두 장은 너무너무 길었다. 꼭 끈적끈적한 젤리 괴물이 도하의 연필 끝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거 아닐까? 왜 지우랑 노는 시간은 짧고, 수학 문제 푸는 시간은 길게 느껴질까? 진짜 시간부자는 혹시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만 잔뜩 가진 사람 아닐까?'
그날 밤, 도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똑딱똑딱, 방 안의 둥근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이쿠, 이런!"
시계의 숫자판에서 손톱만 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등 뒤에 멘 자루에서 반짝이는 구슬 하나를 데구루루 굴러 떨어뜨렸다. 토끼는 허둥지둥 구슬을 다시 주워 담고는 시계 속으로 쏙 사라졌다.
"잠깐만!"
도하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서 내려와 토끼를 따라 시계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몸이 쭉 빨려 들어가는 신기한 느낌과 함께, 도하는 거대한 공간에 도착했다.
그곳은 '시간 은행'이었다. 수많은 째깍 토끼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보낼 시간을 포장하고 있었다. 도하를 발견한 한 토끼가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꼬마 손님, 여긴 어떻게 왔죠? 아직 아침 시간을 배달하려면 멀었는데."
"저... 시간부자가 되는 법을 알고 싶어서요! 왜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가고, 지루한 시간은 느리게 가는지도 궁금해요!"
째깍 토끼는 빙그레 웃으며 시간 구슬이 가득 담긴 상자를 보여주었다.
"자, 이게 바로 시간의 비밀이란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양의 시간 구슬을 받아. 하지만 구슬의 성격은 전부 다르지."
토끼가 집어 든 '신나게 노는 시간' 구슬은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통통 튀었다. 가벼워서 금방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 구슬들은 아주 가볍고 활발해서 네 곁에 머무는 걸 힘들어해. 그래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반면 토끼가 보여준 '재미없는 공부 시간' 구슬은 회색빛에 꾸덕꾸덕한 잼 같았다. 바닥에 내려놓자 찐득하게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구슬들은 아주 무겁고 게을러서, 네가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질척이며 아주 느리게 움직인단다."
도하는 이마를 탁 쳤다. "아하! 그럼 반짝이는 구슬만 잔뜩 받고, 끈적이 구슬은 받지 않으면 시간부자가 될 수 있겠네요!"
째깍 토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끈적이 구슬이 있기에 반짝이 구슬이 더 소중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거란다. 끈적이는 시간 동안 꾹 참고 무언가를 해냈을 때, 반짝이는 시간이 더 큰 선물처럼 찾아오거든. 진짜 시간부자는 말이야..."
토끼는 도하의 코앞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정해진 시간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끈적이 구슬 같은 시간도 반짝이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란다. 지루한 수학 문제에 재미있는 규칙을 찾아내면 끈적이 구슬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처럼 말이야."
도하의 머릿속에 전구가 탁 켜졌다. 자신이 외쳤던 '시간부자'는 갑자기 생긴 빈 시간을 어떻게 쓸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뜻이었구나!
어느새 도하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꿈을 꾼 걸까? 하지만 도하는 이제 안다. 진짜 시간부자가 되는 비밀을. 다음 날,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하는 끈적끈-적한 시간이 찾아왔을 때 도하는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좋아! 이 끈적이 구슬을 얼마나 반짝이게 만들 수 있는지 한번 해볼까?"
도하는 건반을 누르며 자신만의 신나는 리듬을 섞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무겁게만 느껴지던 피아노 연습 시간이 조금은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시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담론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주관적으로 경험되는가?
시계가 재는 물리적 시간(1분=60초)은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아이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노는 시간 vs 공부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듭니다. 과연 어느 쪽이 우리 삶에 더 본질적인, '진짜' 시간일까요?
시간에 '질(Quality)'이라는 것이 있는가?
째깍 토끼는 시간을 '반짝이는 구슬'과 '끈적이 구슬'로 구분합니다. 이는 시간에 단순히 '양(quantity)'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지루함, 의미 등으로 채워지는 '질(quality)'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내 시간의 질은 무엇이 결정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시간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이야기의 결말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시간부자'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끈적이 시간'을 '반짝이 시간'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정해진 시간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을 통해 시간의 질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주체임을 암시합니다.
'지루한 시간'은 단지 무가치하고 피해야 할 대상인가?
째깍 토끼는 '끈적이 구슬이 있기에 반짝이 구슬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루함, 고됨, 기다림의 시간이 즐거운 시간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나 '고통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은 고등학교 <물리학Ⅰ,Ⅱ> 교과의 역학과 에너지 단원 중 시간과 공간 파트에서 다뤄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관적이고 철학적인 시간은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철학> 교과의 특정 단원으로 고정할 수는 없지만 '삶과 죽음의 윤리', '자아실현', '실존주의' 등의 주제를 다룰 때 심화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시간과 경험의 문제를 다룬 몇몇의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야기와 함께 들여다볼까요?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지속(Durée)'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가입니다. 그는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시간(Temps): 시계가 재는 시간, 과학적 시간입니다. 이는 공간처럼 똑같은 간격으로 나눌 수 있고, 과거-현재-미래가 점처럼 분리되어 있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죠.
지속(Durée): 우리가 내면에서 직접 체험하는 주관적 시간의 흐름입니다. '지속'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녹아들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분리할 수 없는 연속적인 흐름입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 상태에 따라 길이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시간 은행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시간 구슬의 '양'은 '시간(Temps)'에 해당하고, 아이가 경험하는 '반짝임'과 '끈적임'이라는 시간의 '질'은 '지속(Durée)'에 해당합니다. 아이는 '지속'의 문제를 '시간'의 논리로 해결하려다 혼란에 빠졌지만, 결국 자신의 태도를 통해 '지속'의 질을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내 손목시계가 재는 '1분'과, 지루해서 미칠 것 같은 수업에서의 '1분'이 전혀 다른 종류의 시간이라면 어떨까요? 이 근본적인 질문 하나로 1922년 파리에서는 세기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시계의 시간'을 옹호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마음의 시간'이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한 철학자 베르그송. 과연 시간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와 '몰입(Flow)'
심리학자이지만 그의 이론은 시간 경험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을 줍니다. '몰입'은 어떤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이나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짝이 시간'의 심리학적 해석: 동화 속에서 '신나게 노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은 바로 '몰입' 상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몰입 상태에서는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활동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하게 되므로, 심리적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부자'가 되는 법: 째깍 토끼의 마지막 조언("지루한 수학 문제에 재미있는 규칙을 찾아보라")은 '몰입'을 유도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같습니다. 자신의 기술 수준과 과제의 난이도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몰입이 일어나기 쉬운데, 아이는 '재미있는 규칙'을 추가함으로써 '수학 문제'라는 과제의 성격을 바꾸어 몰입을 유도하고, '끈적이 시간'을 '반짝이 시간'으로 바꾼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과 '시간의 의미 부여'
사르트르나 니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삶과 시간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임을 강조했습니다.
니체의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삶의 즐거운 순간뿐만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긍정하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입니다. 동화에서 '끈적이 시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즐겁게 바꾸려는 아이의 마지막 태도는 어린아이 버전의 '아모르파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루한 시간을 피하거나 저주하는 대신, 그것을 끌어안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주체적인 의지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고3 학생들과의 '철학' 교양 수업. 나열식 철학사가 아닌 '철학함'을 목표로 하는 수업이기에,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그 생각들을 같이 다듬어나가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다. 아이들의 생각과 눈빛은 교과서에서 멀어질수록 더 수다스러워지니까.
나는 칠판에 큰 글씨로 질문 하나를 썼다.
'1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60초일까?'
아이들은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거나 중력이 아주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사실을 증명했어. 물리적으로도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거지. 그럼, 우리 마음의 시간은 어떨까?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계가 재는 객관적 시간(temps)과 우리가 체험하는 주관적 시간, 즉 '지속(durée)'을 구분했어."
아이들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졌다. '지속'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두 번째 동화 '수상한 시간부자'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역시나 첫 반응은 '이과'적인 것들이었다.
"아, 쉽네요. '끈적이 시간'은 블랙홀 근처처럼 중력이 강해서 시간 팽창이 일어나는 거고, '반짝이 시간'은 광속 우주선을 탄 거네요."
한 학생의 말에 몇몇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영화광으로 유명한 녀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거 완전 영화 <인터스텔라>잖아요! 밀러 행성에서의 한 시간이 지구에선 7년인 거. 거긴 중력 때문에 시간이 엄청나게 '끈적이 시간'이었던 거네요."
정확한 비유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각자의 '지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과목의 50분은 두 시간 같고,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한 시간은 10분 같다고 했다. 쉬는 시간 10분과 수업 시간 10분의 밀도가 다르며, 밤 10시까지의 야간자율학습 1교시는 교실 전체가 '끈적이 시간'에 빠지는 시간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참 동안 이야기가 오간 뒤, 늘 창가에 앉아 조용히 듣기만 하던 학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시간부자'라는 건, 물리적인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반짝이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거나, '끈적이 시간'을 '반짝이 시간'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네요."
그의 문장은 내가 하려던 정리보다 훨씬 명쾌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교과서의 개념을 자신들의 영화와 게임, 그리고 삶의 언어로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나는 감탄하며 칠판에 그들의 결론을 간단히 적었다.
물리적 시간(temps) ≠ 심리적 시간(durée)
아, 그런데 쓰고 보니 어딘가 허전... 교과서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결국 딱딱한 수식 아닌 수식으로 아이들의 생생한 수다에 마침표를 찍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심란해지려는 순간이었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교실을 빠져나가고, 아까 <인터스텔라>를 언급했던 영화광 녀석이 칠판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가 적은 수식을 잠시 보더니, 분필을 집어 'durée'라는 단어 옆에 작은 토끼 그림 하나를 쓱 그려 넣었다. 토끼는 마치 '내 얘기가 빠졌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녀석은 나를 보며 씩 웃어 보이고는 교실을 나갔다.
나는 칠판에 남겨진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칠판의 수식은 더 이상 입막음의 마침표가 아니었다. 째깍 토끼의 장난스러운 그림 덕분에,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막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