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동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껍질 - 이데아, 킨츠키
[대화의 발견]
아이들은 시간의 흔적을 가장 정직하게 알아채는 발견자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필터가 없어서, 어른들이 애써 외면하는 변화를 꾸밈없이 입에 올린다.
첫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였다. 친정엄마의 무릎에 앉아 놀던 아이는 자기 손과 할머니의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할머니의 검버섯과 깊은 주름을 작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는 왜 쭈글쭈글해? 여기 점도 있네. 내 손은 매끈매끈한데."
그러고는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할머니는 늙고, 안 예뻐서 슬프겠다."
'늙음'은 곧 '슬픔'이라는 아이의 순진한 등식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작 당사자인 엄마는 아이의 솔직함이 사랑스럽다는 듯, "우리 강아지, 눈썰미도 좋네" 하시며 그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실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두 아이의 발견놀이는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어느 주말 오후, 아이들이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결혼식 액자를 용케 찾아냈다. 한참을 저희끼리 쑥덕거리더니, 둘째가 액자로 나를 끌고 와 물었다.
"엄마, 이 예쁜 언니는 누구야?"
"그러게, 아빠 옆에 왜 엄마가 없고 이 언니가 있어? 엄마 친구야?"
둘째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진 속 서른셋의 나는, 아이들 눈에는 지금의 엄마와는 전혀 다른 미지의 '예쁜 언니'일뿐이었다. 엇! 그러고 보니 아빠는 바로 알아본 거니? 흥! 괜히 심통이 났다.
아이들의 솔직한 편견은 때로 극성스러운 효심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며칠 전, 다 같이 TV를 보는데 홈쇼핑 채널에서 안티에이징 화장품 방송이 나왔다. 쇼호스트가 "주름이 마법처럼 쫙! 펴집니다! 주름 다리미!"라고 외치자, 아이들이 갑자기 돌고래 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엄마! 저거 사! 저거!"
"맞아! 저거 바르면 엄마도 그 사진 속 예쁜 언니처럼 되는 거야!"
"엄마, 돈 없어? 그럼 우리 돼지 저금통 깨서 사줄게! 빨리 주문해!"
아이들에게 '늙음'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젊음'은 어떻게든 되찾아야 할 정답이었다. 나는 이 열성적인 두 발견자들에게, 세상에는 정답지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주름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깊은 숲 속에 키 작은 아기 참나무가 살고 있었어요. 아기 참나무는 자신의 매끈하고 반짝이는 연둣빛 나무껍질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죠.
"내 피부는 정말 아기처럼 보드라워!"
아기 참나무는 숲 속에서 가장 오래된 할아버지 떡갈나무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어요.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껍질은 온통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깊은 주름이 가득했거든요. 꼭 거북이 등껍질 같았어요.
'저렇게 쭈글쭈글한 건 정말 못생겼어.'
어느 날 밤, 아기 참나무의 가지에 늙고 현명한 부엉이가 날아와 앉았어요. 부엉이는 아기 참나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죠.
"얘야, 저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껍질이 왜 저렇게 깊고 거친지 아니?"
아기 참나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부엉이는 눈을 감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저기 깊게 파인 상처 보이지? 저건 아주 무서운 번개를 맞고도 꿋꿋이 살아남았다는 용기의 훈장이란다. 저기 거칠게 갈라진 틈들은 수많은 아기 다람쥐와 새들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도록 기꺼이 제 품을 내주었다는 따뜻한 마음의 흔적이지."
부엉이는 계속해서 말했어요.
"저 수없이 많은 잔주름들은 말이야, 수백 번의 여름 동안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게 웃었던 웃음의 기록이고, 저기 울퉁불퉁 솟아난 옹이는 가지가 부러지는 아픔을 견뎌내고 다른 어린 나무들에게 햇빛을 양보했다는 지혜의 증표란다."
부엉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기 참나무는 할아버지 떡갈나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어요. 울퉁불퉁하고 거친 나무껍질이 더 이상 못생겨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진 아주 근사한 역사책처럼 보였죠.
그날 이후, 아기 참나무는 자신의 매끈한 껍질을 자랑하지 않았어요. 대신 앞으로 자신의 나무껍질에 어떤 멋진 이야기들이 새겨지게 될까, 가슴 설레며 기다렸답니다.
아름다움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까요?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의 속성(매끄러움, 완벽함)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해석(이야기, 의미) 속에 있을까요? 아기 참나무는 전자를, 부엉이는 후자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가, 완성하는가?
사회는 흔히 젊음과 새로움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관점에서 시간은 아름다움을 앗아가는 적입니다. 하지만 이 동화는 시간이 오히려 상처와 주름을 통해 아름다움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완성시킨다고 말합니다.
완벽함과 불완전함 중,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에 더 가까운가?
아기 참나무의 매끈한 껍질은 '완벽함'을,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거친 껍질은 '불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이야기는 상처와 흠결 같은 불완전함 속에 더 깊은 차원의 아름다움이 숨어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좋음(善)'은 '아름다움(美)'이 될 수 있는가?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흉터는 용기, 희생, 지혜와 같은 윤리적 가치(좋음)의 흔적입니다. 이 흔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 가치에서 심미적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선함과 아름다움은 과연 연결되어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미학(Aesthetics)의 역사 속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와 깊게 연결됩니다.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론에 대한 반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하며, 영원하고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라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더 가까운 것은 주름 하나 없는 아기 참나무의 매끈한 껍질일 것입니다.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거친 껍질은 이데아에서 멀어진, 불완전하고 추한 것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동화는 플라톤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이야기는 추상적이고 완벽한 이상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역사와 흔적이 담긴 '불완전한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와비사비(侘寂)'와 킨츠기(金継ぎ)의 미학
이 동화의 세계관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은 일본의 미학인 '와비사비*입니다.
와비사비(侘寂): 완벽하지 않고(imperfect), 영원하지 않으며(impermanent), 미완성(incomplete)인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입니다. 낡고 닳아가는 과정, 시간의 흐름이 남긴 자연스러운 흔적에서 깊이와 매력을 발견하는 것이죠.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모습은 와비사비 미학의 완벽한 상징입니다.
킨츠기(金継ぎ): '와비사비'를 예술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킨츠기'입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 깨진 틈을 옻칠과 금가루로 이어 붙여 오히려 그 상처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이는 상처와 실패가 부끄러운 흠이 아니라, 그 사물의 역사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번개 맞은 흉터는 바로 이 '킨츠기'로 수선된 상처와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윤리학적 미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의 '좋음'이 그것의 기능과 목적(telos)을 잘 수행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을 아름다움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떡갈나무의 흉터와 주름은 그가 나무로써의 목적과 덕(virtue)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추위를 막아주고(보호), 번개를 견뎌냈으며(용기),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지혜)했습니다.
즉, 그의 껍질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각적인 형태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윤리적 가치'가 '심미적 가치'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도 고3 '철학' 교양 수업. 오늘도 수다 한 번 떨어볼까?
나는 교실 앞 티브이 화면에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띄웠다. 왼쪽은 패션 잡지 표지를 장식한, 결점 하나 없이 보정된 모델의 얼굴. 오른쪽은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하지만 평온한 미소를 띤, 어느 시골 할머니의 흑백 인물 사진이었다.
"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이유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교실 뒤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쌤, 이건 비교 대상이 아니죠. 왼쪽은 인스타 여신, 오른쪽은 효도 프사 추천."
"밸런스 게임 난이도 최상이네요.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월의 직격탄을 고르라는 거 아닙니까."
짓궂은 농담에 교실이 한바탕 웃음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의 기준은 명확해 보였다. 외모지상주의라는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피로감마저 느끼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동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껍질』을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화면 속 두 얼굴을 가리켰다.
한 학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저 할머니 얼굴의 주름은 나무껍질의 나이테나 옹이 같은 거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작년에 생명과학 선생님과 함께 진행했던 융합 수업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때 우리의 질문은, '노화는 질병인가?'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노화는 세포의 손상이자 기능 저하, 즉 극복해야 할 문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그 '손상'의 흔적 속에서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있었다.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저희 할아버지 손이 진짜 거친데, 평생 농사만 지으셔서 그렇거든요. 그 손 보면 뭔가... 그냥 멋있어요."
"저는 팔에 넘어져서 생긴 흉터가 있는데, 어릴 땐 되게 싫었거든요. 근데 이게 자전거 처음 배울 때 생긴 거라, 지금 보면 그때 생각나서 나쁘지 않아요."
나는 칠판에 '와비사비(侘寂)'라는 단어를 적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 낡고 닳아가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깨진 찻잔을 금으로 이어 붙여 그 흔적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드는 '킨츠기(金継ぎ)' 기법 사진도 보여주었다.
수업 막바지에, 한 아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결국 '예쁘다'는 건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상태고, '아름답다'는 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나 시간을 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화면을 한참 끄지 못했다. 작년의 질문, '노화는 질병인가?'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오늘 아이들과의 대화는 그 질문에 새로운 겹을 더해주었다. 어쩌면 늙음은 과학으로 '분석'하고 철학으로 '성찰'해야만 그 전체 모습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다음번 자율 융합 과정에서는 이 두 질문을 나란히 놓고 아이들과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다. '노화는 질병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의 완성인가?' 문득, 나는 오늘 수업 시간 내내 어느 쪽 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떠올렸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잡히기 시작하는 선들. 언젠가 더 깊어질 나의 주름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새겨지게 될까.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던 오늘의 이 시간도, 훗날 내 얼굴 어딘가에 의미 있는 흔적으로 남게 될까.
나는 과연, 저 할머니처럼 근사하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수상한 시간부자 - 베르그송, 칙센트미하이, 실존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