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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할아버지 안경은 왜 버리지 않아?"

[창작동화] 달의 눈물을 닦아 준 낡은 기와 - 리쾨르, 하이데거, 장자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둘째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던 날이었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계란 하나와 들기름, 간장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계란을 살짝 익혀 갓 지은 뜨거운 밥 위에 올린 뒤 간장을 한 바퀴, 들기름도 한 바퀴 둘렀다. 고소한 냄새가 퍼지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 외할아버지가 엄마 어릴 때 자주 해주던 계란밥이야. 할아버지표 비밀 레시피."


아이는 "할아버지 밥!"이라 외치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의 손맛과 사랑은 나의 기억을 통해 아이의 식탁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막연한 위로가 밀려왔다.


하지만 며칠 뒤, 첫째 아이가 그 위로에 균열을 냈다. 할머니 댁에 갔을 때였다. 아이는 소파 옆 협탁에 놓인 아버지의 낡은 돋보기안경을 만지작거리더니, 물었다.


"엄마, 할아버지 이제 없는데 이 안경은 왜 그냥 가지고 있는 거야?"


나는 대답을 못했다. 계란밥을 만들 때 느꼈던 따뜻한 감정과 아이의 논리적인 질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건조한 사실 말고, 내 마음속 이 복잡한 그리움과 사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감정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내뱉은 말이, 아이에게 죽음에 대한 왜곡된 감정을 심어줄까 두려웠다. '기억'과 '유산'이라는 단어는 너무 어려웠고, 내 일상의 언어는 그 의미를 담아내기에 너무 작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아이의 질문과 계란밥의 온기를 품고 잠 못 이뤘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며 모든 것을 지켜본 사물에게서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 끝에, 하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창작 동화] 달의 눈물을 닦아준 낡은 기와

까마득한 옛날, 달이 매일 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달의 눈물은 차가운 은빛 이슬이 되어 땅으로 내려왔고, 그 눈물을 맞은 풀잎은 시름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꽃들은 피기도 전에 지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더랍니다.


하늘의 별님도, 바람님도 달을 위로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달님, 어찌하여 그리 슬피 우시나요?"


별들이 묻자, 달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저 아래, 오래된 기와집 댓돌에 앉아 매일 밤 나를 보며 웃어주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그이가 앉던 툇마루가 텅 비었으니, 내 마음도 텅 빈 것 같구나."


달이 슬퍼한 것은, 어느 고즈넉한 기와집에 살다 세상을 떠난 한 할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와집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는, 백 년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낡은 기와 한 장이 있었습니다. 기와는 비바람에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볼품없었지만, 그 집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의 첫울음과 숨을 거둔 모든 노인의 마지막 한숨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도 달이 텅 빈 툇마루를 보며 눈물짓자, 낡은 기와가 마른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달님, 당신은 할머니의 '없어짐'만을 보고 계시는군요."


달이 눈물 어린 얼굴로 기와를 내려다보자, 기와가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지요. 저는 압니다. 할머니가 저 툇마루에서 처음 걸음마를 떼던 날, 당신의 빛이 얼마나 환하게 마당을 비추었는지를요."


기와는 자신이 품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달에게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저 툇마루는 할머니가 댕기머리를 땋던 소녀 시절, 수줍은 연서를 읽던 곳이랍니다. 당신의 달빛 아래 얼굴을 붉히곤 했지요."


"저 툇마루는 아들딸을 낳아 무릎에 앉히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곳이랍니다. 당신을 보며 '저기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다' 가르쳐주었지요."


"저 툇마루는 사랑하는 남편의 주름진 손을 잡고, 젊은 날을 추억하던 곳이랍니다. 당신이 차고 기울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 텅 빈 툇마루는,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고르며 '달빛이 참 곱구나' 말씀하시던 바로 그 자리랍니다."


기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달의 슬픔은 점차 그리움으로, 그리움은 다시 따스한 추억으로 변해갔습니다. 달은 깨달았습니다. 할머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모든 이야기가 저 낡은 기와에, 텅 빈 툇마루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자신의 달빛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을요.


그날 이후, 달은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상의 모든 낡고 오래된 것들을 향해 가장 부드럽고 따스한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 빛 속에는 '없어짐'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있었음'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지요.


사람들이 달빛을 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억들이 달빛에 스며들어, 잠든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계란밥과 돋보기안경, 그리고 달과 기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져줍니다.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는가, 남는가?

아이는 할아버지가 '없다'라고 말하고, 달은 텅 빈 툇마루를 보며 슬퍼합니다. 이는 죽음을 완전한 '소멸'과 '부재'로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계란밥 레시피와 기와의 기억은 죽음이 '남겨짐'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육체의 소멸과 함께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계속 머무르는 것일까요?


기억이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힘을 가지는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저장하는 것을 넘어, 기억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계란밥), 슬픔을 위로하는 힘을 가집니다(기와). 기억은 과거에 갇힌 박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능동적인 힘이 아닐까요?


사물은 단지 사물일 뿐인가, 아니면 영혼을 담는 그릇인가?

아이의 눈에 할아버지의 안경은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에게 그 안경은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불러오는 소중한 매개체입니다. 사물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단순한 물질 이상의 의미와 영혼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애도란 무엇인가?

달은 처음 '없어짐'에 대한 슬픔에만 잠겨 세상을 차갑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와의 이야기를 통해 '있었음'을 추억하며 따스한 빛을 되찾습니다. 진정한 애도는 떠난 사람을 그저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그의 삶 전체를 소중히 기억하고 현재의 내 삶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 아닐까요?


죽음이라는 주제는 고등학교 <생횔과 윤리> ‘삶과 죽음의 윤리’, ‘생명 윤리’ 단원에 그리고 고등학교 <문학> ‘성찰과 상실의 문학’ 단원에서 다뤄집니다.

위 질문들을 조명해 줄 수 있는 철학자와 개념을 소개해보겠습니다.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이야기로 남는 존재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되는 '서사(이야기)'를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 삶은 어떤 이야기인가?'라는 질문과 같다는 것입니다.


리쾨르의 관점에서 사람은 이야기로 남습니다. 기억은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와 되살리는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딸을 위해 계란밥을 만들어주시던 사랑의 이야기'는 레시피와 기억을 통해 생생히 이어집니다. 존재는 물리적 소멸을 넘어 서사적 형태로 우리 곁에 머뭅니다.

진정한 애도는 고인의 이야기를 슬픔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나의 삶 속에서 계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계속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계란밥을 만들 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이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사물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물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사물을 '그저 눈앞에 있는 것(전재자, Vorhanden)'과 '내 삶 속에서 의미 있는 도구(용재자, Zuhanden)'로 구분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돋보기안경은 처음엔 아이에게 의미 없는 물건(전재자)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가 책을 읽던 삶의 세계와 연결된 소중한 ‘용재자'였습니다. 한 사람이 떠난 후, 그가 쓰던 사물은 그의 '삶의 흔적'과 '세계'를 증언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됩니다. 사물은 그 자체로 영혼을 갖기보다, 한 사람의 삶과 관계 맺으며 그의 의미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던 사물들을 통해 남습니다. 돋보기안경은 할아버지의 '있었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흔적입니다.


장자(莊子)의 자연의 순환

고대 중국의 도가 철학자 장자는 죽음을 끝이나 소멸이 아닌,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기(氣)의 응축과 흩어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아내가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쉬게 된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관점에서 할아버지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화하여 자연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존재의 끝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순환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진정한 애도는 '없어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죽음을 자연스러운 '돌아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달이 기와의 이야기를 통해 '있었음'을 추억하며 따스한 빛을 되찾는 것은, 상실의 슬픔을 넘어 고인의 삶이 자연의 일부로서 여전히 의미 있음을 깨닫는 과정과 같습니다. 슬픔을 넘어 자연의 순리를 긍정하는 데서 오는 평온함과 따스함이 진정한 애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교실의 철학 수업]

2학년 <생활과 윤리> 시간.

1학기말 수업 관련 설문조사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죽음관‘ 단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결과에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후속 수업을 준비했다.


나는 화면에 동화 '달의 눈물을 닦아준 낡은 기와'를 띄웠다.


"자, 오늘은 교과서를 잠시 떠나볼까? 이 이야기를 읽고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거야."


아이들은 동화라는 말에 피식 웃거나,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스크린을 쳐다봤다. 내가 이야기를 다 읽고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맨 앞줄의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결국 남은 사람들의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으니 '있었음'을 기억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고, 그 기억도 언젠가는 희미해지겠죠."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뒷자리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SNS 계정이 생각났어요. 아는 형이 하늘나라로 갔는데, 페북은 아직 그대로 있거든요. 생일 되면 알림도 뜨고. 친구들이 가끔 거기다 '잘 지내냐'라고 글을 남겨요. 그 형은 없는데, 그 형의 공간은 남아있는 거. 그게 이 ‘기와’ 같은 거 아닐까요?"


교실의 공기가 순간 달라졌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죽음을 자신들의 삶과 연결하기 시작했다. SNS라는 현대적인 소재는 죽음의 '남겨짐'을 훨씬 더 생생하고 복잡한 문제로 만들었다.


"근데 그거, 남은 사람들한테는 좀 잔인할 수도 있잖아요. 잊고 싶은데 자꾸 알림 뜨고 그러면..."

"맞아, 그래서 일부러 계정 삭제하는 경우도 있대."


아이들의 대화가 오가던 중,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한 학생이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얼마 전에, 15년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거든요."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 학생에게로 향했다.

"... 걔가 맨날 물고 빨던 곰 인형이 있는데, 엄마는 이제 버리자는데… 저는 못 버리겠는 거예요. 그냥, 그거 보면 걔가 거실로 막 달려올 것 같아서. 걔 냄새도 아직 남아있는 것 같고."


학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인형이 저한테는… 저 기와였던 거네요."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관념을 각자의 '곰 인형'과 'SNS 계정'으로 가져와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가장 사랑했던 존재의 흔적을 내 삶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라는 것을.


그 서툴지만 진실한 애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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