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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 “왜 나만 동생한테 양보해야 해?”

[창작 동화] 풀잎마을 곤충회의 - 롤스, 왈쩌, 맹자, 노직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첫째의 생일날이었다. 우리는 아이의 생일 선물로 새 운동화를 사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훌쩍 커버린 첫째의 작아진 운동화는 자연스레 둘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남편은 새것만 사주는 첫째와 달리 늘 물려만 받는 둘째가 안쓰럽다고 했지만, 둘째는 아직 언니가 쓰던 물건을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고 기쁘게 여겼다. 평소 탐내던 언니의 것이 자기 차지가 되었으니까. 부모로서는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외식 메뉴를 고르면서 터졌다.

"파스타 먹고 싶어!"

둘째가 외치자, 오늘의 주인공인 첫째가 맞섰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돈가스 먹을래!"

그 순간, 나는 작아진 운동화를 기쁘게 받아 들던 둘째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첫째에게 말했다.

"오늘 동생이 양보도 잘하고 예쁜데, 우리 파스타 먹으면 어떨까? 돈가스는 엄마가 집에 가서 맛있게 해 줄게."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었다. 첫째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그동안 억눌러왔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난 건지 버럭 화를 냈다.


"왜 나만 맨날 양보해야 해! 내 양보는 별거 아니야? 내 생일인데 왜 내 마음대로 못해! 동생은 언니 거 물려받아서 좋겠다! 나는 맨날 동생한테 양보만 하고!"


첫째의 서운함 섞인 분노 앞에서, 나는 보상과 양보라는 저울 위에서 얼마나 서투른 중재자였는지를 깨달았다.


기특함에 대한 보상이 왜 생일을 맞은 아이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했을까. 나는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다.

미안해.




[창작 동화] 풀잎마을 곤충회의

이슬이 영롱하게 맺힌 어느 아침, 풀잎마을 곤충들에게 아주 귀한 보물이 생겼습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다는 '꿀이슬' 한 방울이 커다란 토끼풀 잎사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꿀이슬은 너무나 작고 소중해서,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아무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마을의 모든 곤충이 모여 회의를 열었습니다.


가장 먼저, 부지런한 일개미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꿀이슬은 가장 열심히 일한 곤충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개미들은 밤낮없이 일해서 마을의 길을 닦았습니다. 노력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가장 공정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화려한 날개의 호랑나비가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가장 큰 기여 아닐까요? 우리 나비들이 예쁜 꽃들을 옮겨 심어 풀잎마을을 아름답게 가꾸었잖아요. 가장 큰 기쁨을 준 곤충이 받아야 마땅해요."


그때, 힘센 장수풍뎅이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습니다.


"시끄럽다! 가장 힘이 센 내가 마을을 지키니, 당연히 내 차지다!"


곤충들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회의장이 시끄러워질 무렵, 구석에서 작은 꿀벌 한 마리가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꿀벌에게 향했습니다.


"저는... 꿀이슬을 처음 발견했어요. 그러니 제가 먹거나, 제가 나눠줄 사람을 정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닐까요?"


회의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노력, 기여, 힘, 최초 발견의 권리.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회의를 조용히 지켜보던 늙은 거미 할머니가 거미줄을 타고 스르르 내려왔습니다.


"모두의 말이 다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저기 아픈 무당벌레는 꿀이슬 한 방울이면 금방 나을 수 있다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니?"


순간, 회의장은 조용해졌습니다. 노력도, 기여도, 힘도, 권리도 없는 가장 약한 무당벌레. 곤충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엇이 가장 공정한 분배일까요? 그리고 그 분배는 과연 누가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공정함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동화 속 곤충들은 각자 다른 기준(노력, 기여, 힘, 권리, 필요)을 제시합니다. 이는 공정함이 단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측정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대화의 발견]에서 나는 '기특함에 대한 보상'이라는 기준으로 첫째에게 양보를 요구했지만, 첫째는 '생일 주인공의 권리'라는 기준으로 억울함을 느꼈어요.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공정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분배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꿀벌은 꿀이슬을 '최초로 발견한 자신'이 분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수풍뎅이는 '가장 힘이 센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자원을 분배할 권한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디. 민주적인 합의(회의)를 통해야 할까요, 아니면 특정 자격(권리, 힘)을 가진 개인이 결정해야 할까요?


'필요'는 다른 모든 기준에 우선할 수 있는가?

거미 할머니는 '아픈 무당벌레의 필요'를 제시하며 논의의 판도를 바꿉니다. 이는 절박한 '필요'가 노력, 기여, 힘, 권리 등 다른 모든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가치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줍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공정한 사회의 필수 조건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역차별일까요?


과거의 양보는 현재의 권리를 보장하는가?

[대화의 발견]에서 첫째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수많은 양보를 떠올리며 현재의 불공정함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이는 공정함이 '이번 한 번'의 사건으로만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누적된 경험의 총합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속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에게, 현재의 작은 불공정은 과거의 모든 억울함을 되살리는 방아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배 정의'라는 오래된 철학적 난제에 대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통찰과 연결됩니다.


존 롤스(John Rawls)와 무지의 장막

현대 정의론의 거장인 존 롤스는 진정으로 공정한 분배 원칙을 찾기 위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재능, 가치관 등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뒤에서 합의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동화 속 곤충들이 자신이 개미인지, 나비인지, 무당벌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꿀이슬 분배 규칙을 정한다면 어땠을까요? 롤스는 그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약한 무당벌레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소 수혜자(무당벌레)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차등의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와 복합 평등

현대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쩌는 사회의 가치들이 각기 다른 '정의의 영역(Spheres of Justice)'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각기 다른 기준으로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꿀이슬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두고, 노력(개미), 기여(나비), 필요(무당벌레) 등 각기 다른 정의의 영역이 충돌하는 동화 속 상황은 왈쩌의 이론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영역들이 서로 침범하지 않는 '복합 평등'을 주장합니다.


맹자(孟子)와 측은지심(惻隱之心)

고대 중국의 철학자 맹자는 인간에게는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측은지심'이라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미 할머니가 아픈 무당벌레의 '필요'를 상기시킨 것은 바로 이 측은지심에 호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공정한 분배는 단순히 규칙이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약한 구성원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돕고자 하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과 소유 권리론

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분배의 '결과'보다 그것을 얻게 된 '과정'의 정당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꿀이슬을 처음 발견한' 꿀벌이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스스로 분배 방식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 것이 가장 정당합니다. [대화의 발견]에서 첫째가 '내 생일'이라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역시 노직의 생각과 맞닿아 있죠. 다른 어떤 이유도 정당하게 주어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실의 철학 수업]


생활과 윤리 수업에서 '분배 정의'에 대해 배운 다음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지금까지 돈이나 재산 같은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나누어야 공정한지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런데, 우리가 나눠야 할 것이 과연 그런 것들뿐일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모둠 수행평가에서요! 누구는 자료조사 다 해오고, 누구는 이름만 올리는데 똑같이 만점을 받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미의 말처럼 노력에 따라 점수를 다르게 분배해야 합니다!"


분위기가 급 싸해졌지만, 그 말을 시작으로 교실의 토론은 '풀잎마을 곤충회의'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노력뿐만 아니라 관심도 분배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늘 형한테만 더 관심을 쏟아요. 형이 공부를 더 잘한다는 이유로요. 그건 필요에 따른 분배일까요, 아니면 차별일까요?"


"감정도요! 왜 슬픔이나 힘든 일은 항상 장남, 장녀인 사람이 더 많이 짊어져야 하죠? '네가 맏이니까 참아'라는 말은 감정 분배의 실패 아닐까요? 첫째가 화를 낸 것처럼요."


아이들은 '분배'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칭찬의 분배, 비난의 분배, 기회의 분배, 심지어 교실 내 웃음의 분배까지. 토론은 경제적 정의를 넘어 관계와 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날 토론이 끝난 후, 한 아이가 제출한 소감문의 마지막 문장이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어쩌면 가장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할 것은,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물어봐 주는 '존중', 그리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해', 다시 한번 해볼 수 있는 '기회'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배 정의에 대한 완벽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과 불공정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어른의 존재라는 것을. 교실은 이미 가장 치열한 정의의 실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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