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행복찾기
여행지에서 바쁘게 짐 정리를 하다가 TV 속 김미경 강사님 강의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돈을 벌어 오잖아요. 그럼 식구들이 내가 번 돈을 다 써버렸어요. 나만 바라보는 거예요. 나는 돈을 벌어야 했어요.”
미간에 인상을 가득 쓰고 말하던 강사님은 갑자기 한쪽 팔을 뱅뱅 휘둘렀다.
“팔을 돌려보세요. 팔은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해요. 몸에서 멀어져 가려는 원심력이죠. 그런데 어깨가 팔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구심력이에요. 구심력 덕분에 팔이 빠지지 않고 빙빙 돌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강사가 되고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나를 바라보는 가족 덕분이었어요.”
“아빠가 없으면 어떻게 할래? 뭐 먹고 살겠노?”
아빠가 언제부터 이 말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 속 처음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한두 번 듣는 말이 아닌데도 들을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애한테 이상한 소리 한다.” 엄마가 아빠를 타박하는 말을 배경으로, 나는 ‘아빠 없는 삶’을 상상했다. 나는 동화책 ‘소공녀’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모님이 안 계셔도 ‘소공녀’처럼 야무지게 사는 내 모습을 그렸다.
‘아빠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강력한 펀치의 원심력에 나는 더 큰 구심력으로 반작용했다. ‘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잘 될 거에요. 돈도 많이 벌 거에요.’라고 말이다.
내 살길을 찾아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빠의 밥벌이는 고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이 날카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현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였다. 돈을 벌어 당당하게 살고 부모님도 도울 자신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따뜻한 사랑뿐 아니라 결핍이라는 환경도 함께 주셨지만, 그 결핍은 오히려 미래를 겁내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미래와 어서 한판 붙고 싶은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충치 치료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 한 딸에게 엄마는 모진 말을 하셨다.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 해주시려는 엄마였지만 그 시기에는 두 동생이 모두 고등학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나는 엄마 말에 눈물이 나면서도 정신이 바짝 들었다.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나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내 생계는 스스로 책임졌다.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는 물론 입학금을 제외한 4년간 대학 등록금도 내가 내었다.
엄마와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엄마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도 이 시기를 꼽으셨다. 그리곤 한참 뒤에 엄마가 나에게 툭 물어보셨다.
“소영아, 니도 그때 참 힘들었제?”
“응. 힘들긴 했는데 원래 그렇게 사는 건 줄 알고 살았지, 뭐. 열심히 살았어.”
내가 큰아이를 낳았을 때 우리 엄마는 내 몸조리를 도와주지 않으셨다. 산부인과에 들러 나를 잠시 보시고 곧장 아빠와 함께 일하러 내려가셨다. 서운했지만, 나는 그 마음을 딛고 더 강한 엄마가 되었다. 우리 엄마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따뜻한 곳에서 편한 마음으로 사는지 알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아빠를 닮아 억척스럽게 일도 하고 아이도 열심히 키웠다. 집 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직접 음식을 해서 아이들을 잘 먹이려고 애썼다. 남에게 누가 되지 않게 내 일을 잘 해냈다. 야무지게 내 역할을 해내는 일은 나의 몸에 밴, 당연한 일이다.
‘나를 받쳐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었으면, 우리 집이 조금 더 잘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생활력 있게 잘 사는 것도 내 능력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워보니, 선생님으로서 많은 아이를 만나보니 알겠다. 아이를 잘 받쳐준다고 해서, 집이 부유하다고 해서 아이가 잘 크는 것은 아님을.
풍족하게 자라는 우리 자녀 세대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로 ‘결핍’을 많이들 꼽는다. 배고프다 하지 않아도 먹이고, 필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사주는 요즘 부모들의 자녀 양육 방식은 스스로 하는 힘이 부족한 아이,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무슨 일이든 대충하는 아이, 힘든 타인의 삶을 짐작조차 못 하는 눈치 없는 아이, 부모님께 칭찬만 받다가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좌절을 감당 못 하는 아이. 적절한 결핍을 겪지 못해 스스로 하는 힘 즉, 구심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의도적인 결핍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꽃길만 걷고 싶지만 인생에는 흙길이 많다. 힘들고 벅찬 일, 어려운 일, 때로는 불공평한 일이 동행한다. 부유하다고 무조건 꽃길을 걷지는 않는다. 오히려 흙길을 걸으며 어떤 길이든 걸어갈 수 있는 강인함이 자란다.
내가 겪은 결핍은 강한 구심력이 되어 나를 키워주었고, 부모님께 꽃길을 선물해드리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숙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