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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함께하지 않았던 이야기

K장녀의 행복찾기

by 장소영

“우리 아빠는 어젯밤에 늦게 들어와서 엄마랑 대판 싸웠잖아.”

고2 여고생들의 말풍선으로 가득 찬 쉬는 시간. 친구들은 성적, 연예인, 남자친구, 선생님 뒷담화까지 별별 얘기를 다 터놓더니, 이제는 부모님 싸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 주제에 내 눈과 귀는 책에서 점점 멀어졌고, 결국은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아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한 친구가 자기네 부모님 다투시는 이야기의 물꼬를 트고 나서는 이야기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아빠가 물건을 던졌네, 서로 몸싸움을 했네!’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의 장막이 벗겨진 듯했다.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드라마에서 나오는 화목한 집에서 사는 줄 알았다. 엄마 아빠가 서로 존대하며 그림처럼 하하 호호 웃는 그런 집 말이다.


우리 집 엄마 아빠만 싸우시는 줄 알았다. 규칙없이 다가오는 어느 밤,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올리고, 요동치는 심장을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가 우리 집에만 있는 줄 알았다. 언제 뛰어나가 다투시는 부모님을 말려야 할지 타이밍을 재는 여자아이도 우리 집에만 있는 줄 알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부모님 성토대회로 이어지더니 ‘야! 집집마다 다 비슷하네.’로 끝났던 것 같다. 묘한 안도감이 둘러앉은 친구들을 휘 감쌌다.


수업 시작 종소리에 자리로 돌아가는 친구들의 웃음의 끝이 야무졌다. 눈빛의 끝이 단단했다. ‘집집마다 비슷하지만 나는 비슷하게 살지 않을 거야.’ 친구들은 제 삶의 프롤로그를 쓰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이불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나와 동생은, 마치 다른 집에 사는 사람처럼 우리 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내 역할을 물려받은 동생에게, “요즘도 엄마 아빠 그러셔? 힘들지?”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동생이 대학생이 되고 처음 같이 술 한잔을 기울이던 날, 동생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부모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동안 함께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안에 꽁꽁 싸두었던 이야기를 서로 고백하듯 했다. 이야기는 길었고 시간은 모자랐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위로를 나누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의 부모님 성토대회에서 입을 꼭 다물던 아이였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동생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 마흔세 살의 아줌마가 되어 말문과 함께 글문이 트이고 있다. 글을 쓰며 어린 시절의 나를 찾는다. 혼자 힘들어했던 어린 나를 껴안는다. 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울던 아이를 대신해서 울어주기도 한다. 이제는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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