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장녀의 행복찾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들 딸과 한 묶음이 되어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육아 선배들이 말하는 자유 시간은 언제쯤 오는 걸까? 잠자코 기다리던 나에게도 드디어 그날이 왔다.
“엄마, 오늘 나 친구들 만나러 가요.”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더니, 주말이면 엄마가 아닌 친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 저 지금 출발해요. 40분 뒤에 도착해요.”
딸의 약속 소식에 나도 전화를 걸어 약속을 만들었다. 우리 엄마, 아빠를 보러 가는 약속. 자유 시간이 생기면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 나 혼자서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거였다.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여기저기 집 구경을 한다. 마당이 있고, 텃밭도 있고, 파란 하늘마저 우리 것 같은 예쁜 집. 올 때마다 꽃과 나무, 작물들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여름은 텃밭 작물들의 상승장이다. 호박은 몰라보게 자라 있고 오이와 가지, 토마토는 따도 따도 또 열리는 화수분이다. 이에 질세라 키위나무는 대가족을 이뤘다. 마른 듯 죽어가는 것 같았던 포도나무에는 알맹이 굵은 거봉이 열린다는 반전이 있다.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는 나보다 키가 크다. 오디, 앵두에 무화과까지 달콤한 열매도 있다. 크지 않은 이 마당과 텃밭은 볼 것 많은 전시회, 먹을 것 많은 잔치이다. 성공적으로 잔치를 연 호스트는 우리 엄마, 아빠다. 이 행사에 방명록이 있다면 이렇게 남기고 싶다.
“나무들아, 작물들아, 잘 컸구나.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너희 자랑하신다. 너희 덕분에 웃으신다. 고맙다.”
집을 둘러보고 나서는 엄마, 아빠, 나 셋이서 마당에 앉아 근황 토크를 한다. 전화 루틴으로는 몰랐던 것을 현장에 와서 알아내기도 한다.
“비가 많이 왔다이가, 그날 현관문을 안 닫고 잤던 가봐. 현관에 비가 들이치가꼬. 아침에 잠결에 나갔다가 미끄러져서, 무릎을 다쳤다이가.”
“내가 휴대폰을 막 눌렀는가 봐. 전화가 안 걸어져. 그래서 시내 휴대폰 대리점 가서 고쳤다. 젊은 아들은 금방 하더라.”
그 사이 아빠는 무릎을 다쳤고, 엄마는 며칠 전화가 걸리지 않는 휴대전화와 씨름하셨다.
나는 부모님 사시는 집에는 왜 별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까? 여느 집이든 누가 다치고 아프고 물건이 망가지듯이 부모님도 다르지 않을 텐데. 미끄러져 무릎을 다친 아빠, 휴대폰 터치를 잘못해서 시내까지 나가 도움을 구하는 엄마 모습이 그려져 씁쓸했다.
내 컨디션이 괜찮은 날에는 주방이며 화장실 청소를 해드린다. 정리를 잘 못 하는 우리 엄마를 위한 딸의 특급 서비스다. 식탁에는 아침 먹은 상이 그대로 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가 안 된 그릇이 수북이 쌓여있다. 화가 나지만 치워드리면 되고, 더 자주 와서 도와드리면 될 일이다.
“이런 딸이 어디 있노?”하고 내 공치사를 하며 엄마에게 핀잔을 주면,
“그럼, 사람들이 다 그런다. 이런 딸 없다고.” 차마 감추지 못했던 속상한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어제 여기 다 닦았는데 이래 먼지가 있네.” 정말로 청소했다며 아빠도 한마디 거드신다.
청소도 하고 나면 배가 고프다. 점 찍어둔 식당에서 외식하거나, 나가기도 귀찮은 날에는 중국집 음식을 시켜 먹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아이들 없이, 입에 음식이 잘 맞는지 챙길 남편 없이, 우리끼리 간단히 외식을 한다. 대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복작복작한 기쁨과는 또 다른, 뿌듯한 맛이 나는 식사시간이다.
부모님, 나, 동생 이렇게 원 가족이 아주 오랜만에 외식했을 때 기분이 묘했다. 원 가족이 식사하기까지 왜 이리 오래 걸렸는지, 늦은 시작이 아쉬울 정도로 밥이 맛있었고, 부모님 정도 맛있었다.
원 가족만의 만남을 자주 갖기를 바란다. 아이들에 치여 만년 2순위였던 우리 부모님을 1순위로 올려드릴 수 있다. 부모님은 손주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묶음줄이 풀린지 오래인 엄마, 아빠가 자식들을 만나 다시금 한 묶음 되는 일! 부모님도 당신들 젊었을 시절을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실컷 보게 된 엄마, 아빠의 표정에서 나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엄마 생각에 눈시울 붉어지고, 책을 읽다가 아빠 생각에 오열하지 말고 이제 만나서 서로 눈을 맞추었으면, 서로를 향한 애틋한 이야기를 만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자유 시간이 생기면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이유, 나에게 다른 일보다 이 약속이 먼저인 이유.
엄마 아빠의 얼굴을 실컷 보고,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