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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랑할만한 루틴

by 장소영

“소영이에요. 안부 전화했어요.”


퇴근하며 운전대를 잡자마자 나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남들은 운동루틴, 정리루틴을 자랑하는데 나는 엄마, 아빠께 전화 드리는 게 자랑할만한 루틴이다. 루틴이라는 것이 그렇듯, 매일 빠뜨리지 않아야 하기에 전화 루틴도 매일 하다시피 해야 한다. 며칠 쉬면 운동 나가기 싫은 것처럼, 며칠 바쁜 일로 전화를 쉬면 전화를 거는 손가락도 게으름을 피우기 마련이니까. 퇴근길에 부모님과 몇 분 안 걸리는 통화를 하고 나면 30분 달리기한 만큼의 뿌듯함을 안고 집에 들어설 수 있다.


“엄마, 오늘 잘 보냈어요?” 안부를 묻는 딸에게 우리 엄마는 다짜고짜 텃밭 자랑부터 하신다. 오늘은 가지가, 고추가, 호박이, 오이가 몇 개 났다는 텃밭 자랑을 마치고 나면

“요즘 뭐 해 먹니?”하고 딸 식탁을 점검하신다.

“요즘 깻잎나물을 해 먹으면 좋다. 깻잎을 겹쳐서 착착 썰고 양파를 넣고 프라이팬에서 달달 볶아라. 그러고 멸치 몇 개랑 물 자작하게 넣어서 끓이면 된다.” 나는 단답형 질문을 했는데 끝나지 않는 서술형 답변이 돌아온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 함께 있는 아빠가 대화 상대인 우리 엄마, 내 전화는 엄마의 말동무인 걸 알기에 경청과 인내의 미덕을 발휘해본다. 엄마의 속사포 랩에 살짝 지쳐갈 때쯤 엄마는 뜸해진 내 맞장구를 눈치채셨는지 “그래, 저녁 맛있게 먹어라.” 하신다. 엄마가 알려준 반찬 레시피보다 우리 엄마의 귀여운 말투가 더 반갑다. “응, 엄마도 저녁 맛있게 먹어요.” 나도 애교를 얹어 딸 노릇을 마저 한다.


“아빠, 소영이에요.”라고 전화를 걸면 아빠는 가끔 한 잔 걸친 알코올의 리듬과 함께 “오야. 아빠, 지금 자연인 친구 있는 산에서 한잔한다.”라고 전화를 받으신다. 때로는 “어, 소영이가, 헉헉, 아빠 일한다. 이따가 전화하자.” ‘나 지금 일한다’를 증명하는 가쁜 숨과 함께 대답하신다.


‘술을 먹어야겠다, 먹지 말아야겠다’라는 말, ‘오늘은 허리가 아팠다, 나았다’하는 말들이 돌고 돈다. 그러던 중 나는 엄마, 아빠의 말에서 보물을 캔다. 집에 무엇이 고장 났고 어디가 안 좋아 병원에 가셨다는 이야기가 보물이다. 선물해드린 태블릿에 갑자기 유튜브가 안 나온다는 소식도 그렇다.


부모님의 ‘별일 없다.’라는 말은 자식에게 말할만한 ‘별일’이 없다는 뜻이다. 현관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다친 일은 오랜만에 전화한 자식에게 말할 ‘별일’이 아니다. 다친 무릎이야 곧 나을 텐데, 자식 마음을 불편하게 할 부모님의 별일은 반짝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만다.


우리 엄마 아빠도 그랬다. 며칠 전만 해도 별일 없다 했던 부모님이 갑자기 병원이라 하시기도 했다.

“지금 병원에 엄마랑 여행 와있다이가.” 이미 수술까지 마치고 회복할 때쯤에야 여행 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하지만 요즘처럼 부모님과 자주 전화를 하면 별별 일을 알 수 있다.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에 방어벽이 낮아지고 통화하는 중에 툭 내뱉으시는 거다. 나는 그 보물을 ‘앗싸!’하고 줍는다.

“그럼 이번 주에 내려갈게요.”하고 부모님과 만나는 약속을 잡게 된다. 그리고 어제의 통화는 다음 날 전화 거는 용건으로 이어진다. “아빠, 어제 아팠던 무릎은 오늘 어때요?” 이렇게 말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아빠랑 그렇게 전화를 자주 해?”

나도 그랬다. 엄마에게는 쉽게 전화를 걸어도 아빠에게 전화 거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어쩌다 아빠가 받으시면,

“어, 엄마 있어요?”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고 ‘엄마’라는 접속사를 꼭 불렀다.

심지어 밤중 걸려오는 아빠의 전화는 못 받았으면 했다. 대단한 술꾼이었던 아빠는 일 년에 몇 번씩은 술 취한 채 딸에게 전화하셔서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밤 중에 ‘아빠’라는 글자가 내 휴대전화에서 울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맘졸이며 전화를 받는 일이 없다. 요즘은 부재중 통화목록이 아닌 내 최근 발신목록에 늘 아빠가 있다. 아빠와 나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통화하는 사이다.


오늘도 퇴근하며 엄마에게 한 번, 아빠에게 한 번 전화했다.

“오야~별일 없다. 들어가라.”

편안하고 느긋한 아빠 목소리가 나의 퇴근길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저녁 맛있게 먹어라!”

한껏 귀여워진 엄마의 말투에 친한 친구와 통화한 기분이다. 나는 참 행복하다. 부모님과 자주 전화하는 사이라서. 참말로 남 부럽지 않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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