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의 한 마디에 나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다. 율이 엄마를 통해 율이 언니의 얘기는 익히 들었었다.
중2인 율이 위로 올해 특목고에 진학한 언니는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도 잘하고, 혼자 책도 찾아서 읽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라고 율이 엄마가 나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칭찬을 하셨기 때문이다.
율이는 가끔 언니가 학교 기숙사에서 나오는 주말이면 함께 영화도 보러 가고, 쇼핑도 다닌다면서 언니와 함께 다녔던 경험을 자랑스레 나에게 얘기하곤 했다. 그런 율이의 모습 속에서 나는 율이가 언니를 단순히 자매 이상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율이는 사랑과 존경을 넘어서 언니에 대한 열등감마저 느끼나 보다.
"율이야. 선생님이 언니는 잘 모르지만, 율이 자체로 봤을 때 누구보다 잘 해내는 훌륭한 아이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율이의 생각 그대로를 담은 글이 참 좋아."
어깨가 쳐진 채로 나가는 율이는 보낸 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언니와 비교할 필요 없이 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말을 미처 못 해준 게 못내 아쉬웠다.
그로부터 약 이틀 후, 율이 엄마가 수업에 대해 문의사항이 있다면서 전화를 주셨다. 수업 관련 얘기를 하다가 나는 율이가 언니와 자신을 비교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율이 엄마는 "아, 전에 학교 시험을 못 봤다고 속상해하길래... 괜찮다고, 언니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해 줬는데 마음에 걸렸나 보네요. "
"글도 제가 보기에는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솔직하고 논리적으로 잘 쓰는 아이인데, 늘 자기 글은 형편없다고 자조해서 마음이 아파요."라고 말하자 율이 엄마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에 율이 글들을 보고, 이것만 고치면 좋겠다고 몇 번 얘기해 줬는데 자기 딴에는 마음에 걸렸나 보네요."
그제야 나는 율이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제일 인정받고 싶었던 엄마에게서 자신이 언니에 비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게 아닐까?
율이 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기말고사 시험기간인데, 공부는 전폐하고 종일 게임만 하는 중2 막내를 보면서 왜 형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느냐고 핀잔줬던 것. 형편없이 낮은 점수임에도 공부 안 한 거 치고는 잘 나왔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정신 승리를 하는 아이 앞에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게 잘한 거니?"라고 정색하고 나무랐던 것.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느라 핼쑥한 얼굴로 풀이 죽은 고2 둘째가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겠다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 "잘 먹어야 공부도 하지. 몸이 이렇게 약해서 어쩌냐고? 큰형은 잘 먹으니까 재수생활도 버티지 않느냐." 했던 기억.
아이들의 유독 못하는 것들만 지적하면서, 비교하고,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나름 인정받고 싶어 일부러 웃음 지으며 말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도리어 핀잔을 주면서 엄마의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내 모습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나는 00보다 못하는구나.' 하는 열등감, 패배감에 빠지진 않을까.
"엄마 나도 다 계획이 있어요. 게임만 한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자신감이 줄잖아요."
막내가 나름 볼멘소리로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며, 이제라도 하고 싶은 말들을 가슴속 깊이 밀어 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야겠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난 네가 해낼 거라 믿어."라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지는 않더라도 아이의 자존감을 위해 한 번씩 힘주어 말해줘야겠다. 어쩌면 아이도 엄마의 그런 말 한마디에 목말랐는지 모른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다가 아님을.... 너희들 안에 태산 같은 가능성과 역량이 자리하고 있음을 믿는다고 한마디 건네야겠다.
건넌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흥분한 아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스레 크게 들린다.
"너는 시험을 그렇게 보고 게임 할 정신이 있는 거니?"라고 목구멍부터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꾹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