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가 생각하는 행복

어른의 스승

by 그대로 동행

아이들과 모처럼 영화 '행복을 찾아서'를 본 뒤, 영화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행복을 얘기해 보자고 하자 중학생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각자 생각하는 행복을 앞다퉈 얘기했다.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돈이 많아서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게 제가 생각하는 행복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많이 사랑해 주면 행복해요."

모두 각자 생각하는 행복을 얘기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유독 찬이만 끝까지 얘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에도 과묵하고, 진중한 찬이이기에 나는 아이의 생각이 내심 궁금했다.


"찬이가 생각하는 행복은 뭘까?"

한참 뜸을 들인 뒤, 찬이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무사한 하루요. 하룻 동안 아무 일이 없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찬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우리 모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제 중 2, 15세의 나이 아이가 대답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진지한 대답이라 아이들이 마땅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


나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찬이야. 얼마 전 선생님이 읽었던 책의 작가 김훈선생님이 나이가 70대인데 그분이 바로 너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거든. 무사한 하루를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고. 우리 찬이는 벌써 그 진리를 깨달았구나. 우와, 대단한데..."

그제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이를 향해 웃음 지었다.


찬이는 아들 셋 집의 장남이다. 15세 찬이 밑으로 11세, 5세 남동생 둘이 더 있다. 해외에 나가 일하시는 아빠 대신 홀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찬이 엄마는 말수가 적고, 낙천적이며, 따뜻한 분이다. 찬이와 10세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막내동생 훈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많이 아파 가족들이 힘들었다.


입, 퇴원은 물론이고 심각한 수술을 수 차례 겪은 막내아들을 엄마가 뒷바라지하는 동안 찬이는 할머니 집에 맡겨져, 동생 철이 까지 책임지고 살아야 했다. 할머니 집에 맡겨진 자신도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동생을 챙기는 형 노릇까지 하고, 막내 동생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집에 돌아오신 엄마 곁에서 장남 역할을 했다.


아빠가 없는 집의 장남 노릇을 하느라 어린 찬이는 분명 남 모를 아픔과 힘겨운 순간들을 또래에 비해 많이 감내하지 않았을까.


막내 동생의 힘겨운 투병과 그 어린 아들을 위해 숱한 나날을 고생하시는 엄마의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아이. 자신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나이에 밑의 동생들까지 돌보는 의젓한 장남 노릇을 하느라 다른 친구들이 얘기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만의 행복을 고백했나 보다.


그래서인지 평소 찬이가 하는 불평 중 가장 자주 나오는 게 바로 "동생들이 말을 안 들어서 힘들어요." 였다 나는 그런 찬이의 모습 속에서 아들 셋의 장남 역할을 하느라, 버거워하던 나의 큰애 모습도 발견하곤 했다.

찬이를 통해 나는 아이들도 삶의 경험만큼 생각의 농도가 진해짐을 느꼈다. 아이답지 않은 진중한 대답에 잠시 숙연해졌지만, 그 삶의 고비들을 넘겨온 찬이는 누구보다 더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제야, 나는 찬이가 왜 그토록 성실하고 치열하게 읽고 썼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삶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매일 주어진 순간들이 얼마나 묵직하고 과분한 축복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아이는 이미 한 순간도 허투루 살 수 없는 책임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나는 앞으로도 찬이가 누구보다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멋진 어른으로 자랄 것을 확신한다.


때로는 10대 어린아이의 해맑은 마음 속에 70대 노년보다 더 깊은 철학이 묻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