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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ul 06. 2024

너네 아빠 부자니?

우리만의 연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당시 동네에서 꽤 크고 좋은 집에 속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제법 큰 2층집으로 언덕배기 위에 자리해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손쉽게 눈에 띄는 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당시는 지금과 달리 부모님의 학력이나 직업 등을 아이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손을 드는 방식으로 조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야만적인 일인데 당시 우리들은 별생각 없이 손을 들면서 흘낏홀낏 친구들의 배경을 엿보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대학까지 나온 사람, 고등학교, 중학교...?”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서 아이들을 일일이 손 들게 한 뒤 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이 가관이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부자라고 생각하니?”

지금 같았으면 아이들이 발끈해서 부모에게 고자질할 법도 한 치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순진하고 멋몰랐던 우리 어린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아마, 주희 일걸요. 개네 집은 붉은 벽돌집인데 엄청 커요.”라고 말했다.

주희는 말수가 적고 차림도 평범한 아이였기에 전혀 부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 학교 부근의 부자 동네로 이사 간다고 전학 간 것으로 보아 주희가 정말 부자했던 것 같다.


고작 10세에 불과한 그 어린 나이에도 우리는 서로 누가 부자고 아닌지쯤은 마음속으로 이미 가늠하는 영악함 정도는 장착한 것이다.     


학기 초 어느 날, 친구들의 레이다에 내가 잡혔는지

 한 친구가 나에게 와서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라고 물어왔다. 반에서 예쁘고 인기 좋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였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나와 별로 친할 일이 없는 친구가 와서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 나는 얼떨결에 “응.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친구는 자신의 친구를  2명이나 거느리고  우리 집을 따라왔다.

친구는 이미 나의 정보를 알고 있었는지 말없이 나의 뒤를 따라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대문을 열자 한눈에 펼쳐진 너른 정원 한가운데 총총이 박힌 돌들을 하나씩 밟은 끝에 계단을 올라간 뒤  현관문을 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당시로서는 드물게 피아노, 소파 등을 갖춘 거실이 들어왔다.


친구들은 전혀 쭈빗거리지 않고 별반 친하지 않은 나의 집에 온 것을 자기 몸에 맞춘 편한 옷을 입은 양 집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둘러봤다.     


그때였다.

안방에 계시던 아빠가 목발을 짚고 방 밖으로 나오신 게. 아빠는 학교에서 돌아온 딸을 보고 환히 웃으시며 “아, 학교 다녀왔냐?”라고 반겨 주셨다. 그러고 이내 친구들을 보시더니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평소 붙임성 좋고, 유쾌한 아빠 성격이지만 어린 딸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는 것을 보고 긴장하신 게 분명했다.  


나는  아빠의 표정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친구들의 표정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경직되긴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보는 목발을 짚은  아저씨  앞에서 모두 얼음이 돼할 말을 잃은 채 서있었다.


그때, 우리 집에 오겠다고 제일 처음 제안했던 인기 많은 친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빠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동행친구 00예요.”

아빠는 그제야 “오, 그래? 잘들 놀다 가라.”라고 말씀하시며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셨다.


순간적으로 흐르는 우리 사이의 어색한 냉기를 피해보려 나는 일부러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우리 이제 2층으로 올라가 놀까? ”라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경직되었던 표정을 서툴게  해제한뒤 “좋아.”하며 따라왔다.     


2층으로 올라와 내 방에 들어서는데 아까 생글거리며 우리 아빠에게 인사했던 인기 많은 친구가 내 앞으로 다가와 큰 소리로 물었다.

“너네 아빠 부자니?”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 친구의 얼굴을 빤히 보니 한 번 더 말한다.

“부자니까 너희 엄마가 결혼해 준 거 아니야? 안 그러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겠다.

한 마디로 다리가 불편한 너희 아빠가 부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정상적인 너희 엄마와 결혼했겠냐는 뜻이렸다.


갑자기 혹 치고 들어오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얼버무리며 진땀을 뺐다. 부자라고 하면 우리 엄마가 아빠 돈보고 결혼한 사람같이 보이고, 부자가 아니라고 하면 그럼 왜 너네 아빠랑 결혼했냐고 물을지도 모르니.. 어린 마음에 속으로 오만생각이 다 들었다.


그 이후 그 친구들과 어떻게 놀았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어쩌면 선택적으로 내가 삭제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그 친구의 “너네 아빠 부자니? 그러니까 너네 엄마가....”라는 말만 내 기억에 수십 년 동안 선명하게 박혔을 뿐이다.

그 말은 아빠가 당신의 인생동안 수도 없이 받아왔을 사람들로부터의 모멸과 차별, 냉대와 수치를 다 동반한 편견을 집약한 말이기도 했다.     


그 친구의 오해와 달리 부모님은 순수하게 맞선으로 만나 보통 사람들처럼 연애생활 끝에 결혼하셨다.  10남매의 막내로 불과 5세 때 아버지를 6.25 전쟁통에 잃은 엄마는 항상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고 한다. 마침 우리 아빠는 전쟁통에 다리 불편한 아들을 직접 당신 등에 업고 오신 아버지가 계셨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본 순간 한눈에 당신의 아버지를 떠올리셨다고 한다. 저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그 아들도 분명 훌륭한 사람일 거라고.  그리고 아빠의 다리가 불편한 것도 기도하고 엄마가 잘해주면 다 해결될 일로 내심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인정 많고 명랑한 엄마와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아 다리만 불편할 뿐 긍정적이고 유머가 풍부한 아빠가 만나 결혼하셨다.      

부모님의 결혼사진


엄마는 결코 돈을 보고 결혼한 게 아니었음에도 친구는 장애를 가진 아빠가 부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결혼했겠냐는 자신의 얄팍한 판단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이다.     


그 이후 학교에 가서 나는 가끔 당혹스러운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등뒤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다.  
 “개네 아빠 병신이라며?”“개네 엄마는 돈보고 결혼했나 봐.”라는 류의 천박하고 편견 어린 말들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그런 딸의 기류를 알았는지 하루는 하교 후 단짝 친구와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낯익은 그림자가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아빠가 목발을 짚고 이곳으로 오고 계신 것이었다.


순간 고개를 들어 아빠임을 확인한 뒤 한동안 나는 얼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는 척을 할까? 친구가 또 놀리면 어쩌지?”

고백건대 나는 솔직히 친구 앞에서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빠가 뒤돌아서 사라져 주기만을 바랐다. 그런 내 마음속 외침을 아는지 딸을 알아본 아빠가 황급히 등을 돌려 옆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아빠의 뒷모습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애들에게도 알려진 이상 아빠 마음까지 상하게 할 수는 없다. 만일 지금 아빠를 외면한다면 이따 집에 가서 내가 아빠 얼굴을 어떻게 보겠는가.


아빠.” 

용기를 내어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딸의 외침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셨다. 순간 아빠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쳐갔다.  내 옆에서 쭈빗거리던 친구도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인사를 했다.     


그날로부터 수 일이 지난 후,  나는 우연히  방 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빠의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아 글쎄, 우리 큰딸이 그때 나를 길에서 아는 척을 하면서 달려오지 뭐야. 그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애가 나를 그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갈 거라 생각했거든. 그래도 그렇게 딸애라고 와서 아는 척해주니 기분이 좋더라고.”          


딸이 아빠를 아는 척하고 달려가는 건 당연한 건데 그 사소한 마주침 조차 아빠에게도 그토록 곤혹스러운 일이었구나. 딸이 모른 척하고 지나갈 거라 지레 짐작한 아빠는  얼마나 속으로 마음 졸이셨을까.

그러나 나는 안다. 설사 내가 모른 척 외면했더라도 아빠는 나를 이해하셨으리라는 것을.    

 

돌이켜 보면 내가 친구들 앞에서 남모를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을망정 내 인생에서 아빠를 위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도 나는 “너네 아빠 부자니?”류의 날 선 말들과 시선의 폭력을 왕왕 겪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게 그 정도라면 당사자인 아빠가 겪었을 폭력의 부피는 얼마나 컸을까.   

   

10세 어린 나이에 세상의 일그러진 편견에 눈뜨기 시작한 딸이 할 수 있던 최고의 효도를 했노라고, 문득 아빠가 그리운 순간 나는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적어도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의 편견과 수군거림을 함께 이겨나갈 연대를 시작한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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