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놓기 바쁘게 온 집안에 진동하는 음식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부엌에서 아빠가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아빠, 오늘은 뭐예요?”
“어, 오늘은 햄버거다.”
어린 시절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뉴코아에 롯데리아 햄버거 체인이 처음 생겼을 때 우리 집 최고의 외식은 롯데리아 가서 햄버거를 사 먹는 것이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올라간 맏딸인 나와 두 동생에게 부모님은 가끔 햄버거를 사주곤 하셨다.
이제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더 이상 햄버거는 그때 같은 고급 외식거리가 아니었지만, 어린 때 추억을 생각하셔서인지 아빠는 가끔 햄버거를 만들어 주셨다.
양다리를 못쓰셔서 목발을 짚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빠는 손수 동네 정육점에서 고기를, 슈퍼에서 각종 야채를 사다가 수고로운 칼질을 거듭하셔서 곱게 다진 고기와 야채를 섞어 햄버거를 만들어 주곤 하셨다.
요즘이야 야채를 가는 기계도 있어서 예전보다 야채나 고기를 가는 게 훨씬 수월했지만 내가 여고생이던 30여 년 전만 해도 일일이 손으로 야채와 고기를 갈아서 햄버거를 만든다는 건 보통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햄버거를 당신이 직접 장을 봐서 딸의 하교 시간에 맞춰 정성껏 칼질을 하며 만들고 계신 것이었다. 아빠를 대신해서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느라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러 나가는 엄마 대신 그시절 살림은 전적으로 아빠의 몫이었다. 아빠도 우리가 어릴 때는 건설회사에서 직장 일을 하셨지만, 성치 않은 몸과 나이로 인해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에는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셨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딸들 뒷바라지를 위해 아빠가 지어주시는 밥과 반찬은 거의 일품정식으로 한 가지 요리를 해주시면 우리 가족들은 두고두고 그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먹었다.
어묵탕, 곱창, 미역국, 불고기 등 아빠의 일품 메뉴는 매일 새롭게 갱신되었다. 그 메뉴들 중에서 우리의 최애 메뉴는 단연 햄버거였다.
햄버거는 집에서 만들기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고기를 다져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 안에 당근, 양파 등의 야채를 곱게 갈아서 넣고, 반죽이 잘 되도록 밀가루 등을 섞는 건 기본이다. 이 모든 작업들을 몸이 성한 사람이 종일 붙어서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엉덩이를 쓸어가며 손수 빗자루질, 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한 뒤 또 목발을 짚고 서서 아빠가 힘겹게 칼질을 하고 계셨다.
나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늘 음식이 다 될 때쯤에야 방문을 열고 나가서 음식맛을 보는 게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뚝뚝한 맏딸로 아빠 음식이 맛있다고 얘기한 기억도 별로 없다.
거칠고 두툼한 중년의 아빠 손처럼 햄버거도 그렇게 큼직하고 순박했다. 시중에서 파는 동그랗고 먹음직한 햄버거에는 비길바가 아니었지만 아빠의 햄버거는 그 나름대로 순수하고 정직한 맛이었다.
가끔 아빠가 끓여주는 어묵탕은 msg 맛이 물씬 풍겨서 입맛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결혼한 이후 내가 요리를 하면서야 그때 입맛을 끌던 묘한 맛이 바로 어묵탕 안에 들어있는 분말가루와 미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세 아들을 키우면서 가끔 아빠가 해주셨던 옛날 그 시절 음식들이 생각나서 몇 번 시도를 하느라 햄버거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정육점에서 고기를 갈아달라고 해서 들고 왔다. 그리고서야 우리 아빠는 당시 정육점에서 고기를 갈지도 않은 채로 사 와서 당신이 직접 갈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기를 갈아와서 레시피를 보며 야채를 다지고, 계란을 풀어놓고, 간을 맞추고 하는 게 얼마나 지난하고 손이 많이 가는지 그때 한 번 만들어 본 이후에는 다시 만들 엄두를 못 냈다. 엄마의 햄버거를 먹고 별 반응이 없던 아들들의 표정도 나의 빠른 포기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나는 가끔 아빠의 음식이 그리울 때마다 아빠가 해줬던 그대로 음식을 해보곤 했다. 그때마다 신기하게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의 음식향, 풍미가 내 주위를 휘감았다.
오늘 아침에는 냉장고의 반찬통들을 꺼내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며느리 아프다고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반찬통 네댓 개를 냉장고에서 꺼내려는데 목발을 짚으니 들고 갈 손이 없다. 하나하나씩 간신히 들고 가자니 몸이 기울고 위태하다. 시간은 없어 빨리 애들 밥을 차려야 하는데 남은 것들은 언제 들고 가나 몸은 쑤시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인대를 다쳐 네발로 걷고서야 나는 일상 곳곳에 배어 있는 아빠의 눈물과 한숨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아빠가 부엌에서 목발에 의지해 힘겹게 일하셨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어깨가 덜 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당신의 말년에 누워 지내며 진통제를 한 움큼씩 드시던 지독하고 야박스런 통증이줄어들지 않았을까.
단 일주일 하고도 나는 이렇게 힘든데, 아빠는 어떻게 평생 그 나무 목발을 짚고 사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