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울며 너무 괴로워하는 순간을 옆에서 보고 있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처가 될 것만 같고, 한편으로는 그 고통을 내가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대신 아플 수 없다는 죄책감과 무력함에 숨이 턱 막히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되어 함께 저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경험하며 살아간다. 행복하게만 살다 죽을 수 있다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을 이 ‘고통’에 대해 우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점차 늙고 아프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한없이 덧없다 느껴질 때도 많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 보이지 않던 눈물을 흘리시던 할아버지의 그 빨간 눈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그 어떤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었기에.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저자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는 그 슬픔을 이해해야만 하지만, 그 슬픔을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은 고역이기에 피하고 싶은 인간의 이기심 사이의 비참함을 얘기한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 그 고통을 함께 하며 우리는 힘겹게 그의 고통을 안고, 또 그를 바라보며 또 새로운 고통을 맞이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본다. 내가 당신의 아픔을 배워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 고통에 근접하게 수렴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함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