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해질 시간
- 너 엄마한테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그랬다며?
- 어. 엄마가 계속 잔소리하니까 그냥 그랬지 뭐.
- 너 웹툰 계속하고 있잖아. 그거 아직도 말 안 했어?
- 그거 그냥 취미생활인데 뭐. 괜히 엄마 알면 또 얼마 버냐, 그래가지고 어떡할래, 잔소리 끝도 없다.
- 누나도 엄마 돼봐서 아는데, 원래 엄마들은 자나 깨나 자식 걱정이야. 어쩌겠어. 이모도 (잔소리) 안 하려고 해도 잘 안 된대. 니가 좀 안쓰럽게 생각해라. 이모가 지금 갱년기잖니.
- 그것도 그런데. 사실 누나. 나 진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그냥 좋아하는 그림 좀 그리고 친구들 좀 만나고 집에서 누워서 이러고 있는 게 좋아. 그냥 그렇게 쭉 살면 안 돼? 뭘 하는 게 다 귀찮고 싫어.
- 다 싫다는 거 진짜야? 너 아까 이모한테 점심 엽떡 시켜 달라 그러더만. 다음 달에는 친구들이랑 도쿄여행도 간다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 먹고 싶고 놀고 싶긴 한가 보네.
- 하. 진짜 누나도 말 안 통한다. 엄마처럼 말해.
- 어, 나는 당연히 이모 편이지, 네 편은 못 들겠다. 부모가 널 낳았다고 해서 네가 원하는 걸 다 해줘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야.
태어나자마자 걷지도 못하는 인간이니까 안아서 키워줬지, 초딩이 되어도 아직 인간이 덜 됐으니까 가르치고, 고딩이 되어도 아직 철을 모르니까 부모가 교육시키고 의식주 다 대 주는 거지.
스무 살 지나면 대체 부모한테 기댈 이유가 뭐야.
지 살 길 지가 알아서 찾아야지.
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거,
진짜인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건 그냥 '일'에만 국한된 거 아니야?
00아, '일'은 누구나 다 하기 싫은 거야.
다들 월요일이면 출근하기 싫고, 따뜻한 침대에 더 붙어 있고 싶고, 좋아하는 콘텐츠 보면서 맛있는 거 먹고 쉬고 싶어.
그래도 무릇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어른이 되었으면, 노동을 해야 그런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엽떡이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니?
다들 엽떡 사 먹으려고 월요병 이겨내고 출근하는 거야.
이모가 젊었을 때 몇 십 년간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아둔 돈으로 다 네 배 채우고 있는 거라고.
부모 등에 빨대 꽂는다고들 하지.
나는 그런 부모들이 자식 다 망친다고 생각해.
멍청하게 앉아서 경험 쌓는다고 해외여행이나 예약하고 있는 자식이 있으면 앉혀 놓고 혼내야지.
우리 이모가 백 번 옳아.
젊었을 때 진정한 경험을 쌓는다는 건 맥도날드 알바하는 거지, 도쿄여행 가서 면세품 사 오는 것만 경험이 아니라고.
환차익이나 코인이니 다 그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긴 하다만,
일확천금이나 쉽게 돈 벌 궁리만 하면 인생에 보람이라는 걸 느껴볼 겨를이 없어.
매일같이 돈, 돈 하다 보면 네 인생은 삽시간에 돈한테 장악당할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일'만 말하는 게 아니야.
원초적인 욕구부터 생각해 봐도 좋아.
친구들이랑 스벅 커피를 먹고 싶다든지,
주말 점심에는 엽떡을 시켜서 티브이 보면서 낄낄대며 먹고 싶다든지,
끝내주는 여친을 꼭 사겨봐야겠다든지,
웹툰으로 영화 한번 내 보고 싶다던지,
정말로, 진실로, 네가 좋아하는 게 뭐야?
그걸 하고 살려면, 그런 동기를 명확히 알게 되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은 자연스럽게 정해질 거야.
물론 그렇게 '일' 또는 '직장'을 구하고 나서 힘들고 어렵고 후회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
그 안에서 돌파구를 찾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일단 해 봐야 알잖아.
남들이 다 대기업 간다고 해서 대기업 붙어서 갔는데 또 너한테는 안 맞을 수도 있어.
상명하복 문화도 싫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상사의 되지도 않는 소리에 장단 맞춰 가며, 시답잖은 고객들한테 온종일 굽신거려야 하는 그런 일들을 맞닥뜨리고 나면 진짜 하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
그럼 또 다른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남들이 틀에 박혀서 싫다는 그런 일들이 너한테는 맞을 수도 있는 거고,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해보지도 않고, 이거 저거 다들 힘들다고 하니 그냥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이나 봐야겠다, 이랬던 니네 형 지금 뭐 하고 있어.
모두의 부러움을 사면서 공무원 7급씩이나 붙어 놓고도 경우 3년 다니고서 저렇게 후회하고 있잖아.
원하던 게 아니었대.
거봐. 저렇게 똑똑한 네 형도 저렇잖아.
사람들 사는 거 보면 다 똑같아.
나는 그래도 그런 후회를 하는 과정이 참 멋진 일인 것 같아.
너 고통 후에 오는 해피엔딩이 얼마나 짜릿한 지 못 느껴봤지.
그건 진정한 고통 속에 들어간 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야. 내가 참고 견디고서 도달한 그 마지막 순간의 고차원적인 쾌락.
응, 이게 나야. 이런 말이 절로 나오지.
귀찮고 다 싫고, 난 이거 네 말 습관 같아.
너 안 귀찮아해.
어제도 슈크림빵 먹으면서 새벽 몇 시까지 웹툰 그리다가 잤잖아.
그러면서 왜 자꾸만 자신을 과소평가해.
그렇게 좋아하고 매달리는 일이 있는데 자신의 능력을 비하하냐고.
네가 지금 잘 나가는 웹툰작가도 아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무명의 웹툰작가로 끝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유명해지는 게 너의 바람이야? 이모말고 네 바램이냐고?
네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그렇게 따져 보는 거야. 네 엄마랑 상관없이.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적당히 즐기면서 살고 싶은지,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 지는 네가 생각해 봐야지.
이모가 너 돈 못 번다고 뭐라하든말든, 니 인생인데.
- 내가 뭐 생각하고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되나 뭐.
- 아닌 것 같지? 말에도 기운이 있어.
네가 '바란다고 그게 되나 뭐.'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무엇도 이뤄지는 게 없겠지.
'열심히 하면 다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운들 사이에서 너는 설 자리가 아예 없을 테니까.
물론 노력만 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닌 건 알지.
하지만 나는 너를 어려서부터 봐 왔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어.
네가 원하면, 네가 생각하면 언젠가 분명 너는 그 모습이 될 거야.
- 누나는 그럼 이렇게 회사 다니고 애 둘 낳고 큰 이모한테서 맨날 잔소리 들어가며 이렇게 힘들게 살고 싶었어?
- 나? 나도 내 선택이었지.
끝도 없는 고민을 거쳐서 그런 결정들을 했던 거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서 독립하고 싶었고,
결혼해서 애도 넷은 낳고 싶었고.
북적북적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 했지.
그러려면 내 꿈은 포기해야 했어.
분명 후회할 거란 걸 알았지만 선택은 해야 하니까.
두 길을 다 갈 수는 없잖아.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몸이 많이 아프고 그러면서 힘든 시기를 십 년 넘게 보냈지.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꿈을 한순간에 접고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도 있었고, 부잣집 남자친구를 버리고 평범한 집에 시집간 것도 후회한 적이 있었고.
그런데 살다 보니까, 아니 살아내다 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행복한 결말들이 하나씩 생겨났어.
그 행복한 결말이 주는 끝없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또 그다음의 선택을 만들어내더라.
물론 지금도 사는 게 힘들지.
하지만 나는 인생이라는 게 고난의 길이라는 걸 인정하거든.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렇게 편하게 사는 사람으로 인해서 가장 가까운 누군가 그 옆에서 굉장히 불행하게 살고 있을 거야.
인생이 짧고도 길다고 하잖아.
내 기회는 다 놓쳤고, 내 나이가 너무 많다고 느껴질 때, 또 기회가 오더라고.
내가 준비만 돼 있다면 언제든 내가 불러낸 그 기운이 세상을 돌고 돌아서 나를 찾아와.
누나는 네가 그런 생각들을 끝없이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
네 생각의 꼬리를 물고 계속 나아가면 그 끝에는 대체 뭐가 있을지.
생각은 너를 자유롭게 만들거야.
- 그럼 누난 요새 무슨 생각하며 살아?
- 나는 요즘 조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어.
중년에 들어서면서 부쩍 늙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마음이 엄청 조급해지더라고.
이 나이에 아무것도 이뤄 놓은 게 없는 것 같고, 건강도 썩 좋지 않고.
근데 내가 다시 이십대로 돌아간다고 한 들, 그 때라고 조급해하지 않을까.
나는 이미 늦은 것 같고,
틀린 것 같고,
지금부터 달려도 결승점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기분.
그치만 생각을 고쳐 먹었지.
나는 갈 수 있다.
언젠가는 저 결승점에 도달한다.
허들을 넘고 또 넘고 하나씩 차근차근 나는 가보겠다.
그런 생각하면서 지내.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그러고 나서 내가 조금 우아해졌다는 얘기를 친구들한테 들었어.
내가 바라는 바였거든. 우아해지는 거. 그걸로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