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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이슬 Dec 27. 2023

단어의 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심보와 마음속 바탕은 같지만 다릅니다.


며칠 전 어느 날, 산을 내려오며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벽돌 담장 틈에 다 먹은 커피 일회용 컵이 세워져 있었다. 그날은 나라도 주워서 버리자는 쪽으로 대문이 활짝 열렸다.



 행여 나를 착한 사람으로 오해할 여지를 남긴다면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 나는 쓰레기를 아무 곳에 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다들 학생 때 한 번쯤 불량한 학생처럼 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반문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염색하고 파마하고 치마 짧게 입는 행위와는 다르게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는 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양식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을 살았던 내가 그날은 버려진 일회용 컵을 들고 주변에 쓰레기통이 어딨는지 눈에 불을 켜고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와 인도를 구분하는 펜스 모퉁이에 공공용 일반쓰레기 봉지가 놓여있었다. 그곳에다가 쓰레기를 버렸다. ‘대체 누가 쓰레기를 이런 곳에 버리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대신 오직 쓰레기를 버려야겠다는 마음 그 하나로 나온 행동이었다. 순수하게 우러나온 선한 행위에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 치이지 않아 마음의 곳간이 넉넉한 하루였다.



다음 날은 눈이 수북이 쌓여 산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하천이 있는 둑을 거닐었다. 가다 보면 높이가 큰 계단이 하나 있다. 그 계단에 인적이 하나 없어 그야말로 눈이 ‘내린 그대로의’ 눈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하얗게 쌓인 눈을 밟고 싶은 심보가 올라왔다. 어제는 길 가다가 담벼락에 두고 간 쓰레기를 주워 근처 쓰레기 통에 버려주려고 마음이 확 열리면서 오늘은 심보를 홱 바꾼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나저나 심보란 게 뭐지?‘




심보란 단어의 쓰임은 아는데 속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검색창을 켜 찾아보니 '마음속 바탕'이라고 풀이된다. 풀이를 보자마자 신기하게도 단어가 살아있는 듯한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마음속 바탕은 마치 바다처럼 단어의 깊이가 넓고 커 보이는 반면에 심보는 속이 좁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처럼 단어에는 같은 뜻을 지니고도 그 맛이 다를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관용어에 달려있었다. 익숙하게 들었던 단어에 짙은 색이 묻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단어의 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심보의 이미지가 이토록 좋지 않은 데는 오랜 시간 단어에 음영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심보와 관련한 말을 떠올려 보니

'심보가 고약한 놈, 도둑놈 심보, 놀부 심보, 심보 좀 그렇게 쓰지 말아라' 등이 자연스럽게 나열된다. 누군가 억양을 강하게 줘서 말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이와 달리 '마음속 바탕'이라고 표현하면 부드러운 표현들이 어울리는데 단어에 관습이 베여있지 않다. 사람에게 이미지를 씌우면 그 이미지가 쉽게 사라지지 않듯 단어에도 이미지가 한번 들어가면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또한 심보 앞에 살이 붙은 이야기들은 '좋음과 나쁨'의 결과로만 채점당하기 일쑤다. 왜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고 수많은 눈 중에 가장 깨끗한 눈은 왜 밟고 싶었는지 아무도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렌즈를 바꿔서 껴보기로 했다. 렌즈의 초점은 '심'이 아니라 '보'로 맞추어졌다. ‘보’ , 즉 '바탕'을 알려고 하니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어떤 것들을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는 것이 보였다. 하나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살아라’가 자칫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된다로 오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서 착한 자식으로 사는 갑갑함을 아무도 모르게 밖에서 분출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건 바라보기의 차이이진 않을까? 같은 단어에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 보이듯이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차이를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얀 눈을 신발로 더럽히는 것이라 생각할지 아니면 하얀 눈에 그저 내 발자국을 첫 번째로 남기고 싶은,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내가 첫 선보이고 싶은 의식에서 나온 아주 사소한 선구적 행위일지. 마음속 바탕 가르기는 오직 자신에게서 나온다. 매일매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선악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밟기 직전에는 못된 심보인 줄만 알았는데 뽀드득 귀를 간질거리게 하는 소리에 마음이 열리고 내 발자취에 선(善, 착할 선)이 마음속 바탕에 드러났다.



'인생수업 <퀴블러로스 지음>' 책에 보면 "신은 실수를 하면서 계속 발전해 가는 선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산다. 어제는 어제의 실수를, 오늘은 오늘의 실수를 한다. 그 실수를 토대로 깨닫고 성장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높이 쌓다 보면 언젠가는 자비심까지 생길 것이라 굳게 믿는다. 우리 모두는 훌륭하고 소중하고 경이로우니까.



"우리는 대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훌륭함을 기억하고 우리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서로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수업 2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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