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만 원짜리 '약방 기생'과 빨간 카드

낮아진 자존감과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

by 지인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다. 21살 2월 졸업식을 앞두고 먼저 개인병원에 취업을 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열심히 성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계장이라는 분은 과묵하시고 표정도 알 수 없었다. 속을 몰라 답답했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너무 유하다, 사기당하기 딱 좋은 듯한 얼굴을 가졌다. 근데 개인적인 업무를 자주 시켜서 좀 짜증 나는 사람이다.

나중에 오신 부장은 좀 이상한 사람이다. 딸기를 줬더니 꼭지를 따서 달라하고 수박은 잘게 잘라달라고 하고,

참 그런 요구는 집에서나 하시지 왜 직장에서까지 과한 부탁을 하실까?

간호조무사 2명은 선임이지만 잘 챙겨주셨다. 젤 큰 언니는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고, 화장실을 다녀오면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머리가 아팠다. 가끔 담배를 사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둘째 언니는 남자 친구가 손에 화상자국이 있는 장애를 가진 분이다. 사랑을 해서인지 여유 있더니, 나중 헤어짐에 스트레스를 나에게 엄청 쏟아내서 힘들었다. 막내로 들어가서 업무를 배우며 상처도 많이 받고 실수로 곤란하기도 하고 내가 정말 바보 같았다.

학창 시절 느끼지 못했던 신체화 증상을 겪었다. 이것이 신체화 증상이란 걸 안 것은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여자가 짧은 치마 입고 있어야 눈요기가 되지 "

라는 말로 난 충격이었다. 약방 기생이란 말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로 여성으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자의 시선도 넘어야 할 숙제인 것 같았다. 능력이 아니라 남성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는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그 모멸감은 목에 복숭아씨가 걸려있는 듯 내려가지 않았다.

65만 원 월급 받고 일주일 야간 이주일 주간으로 돌아가는 근무다. 50만 원 적금 들고 15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다니니 크게 쓸데도 없다.

카드를 잘 몰랐던 난, 현금서비스와 현금인출을 구분하지 못해 심부름을 잘못하기도 했다. 부장이 현금 좀 빼와라 해서 카드를 주셔서 현금 인출을 한 것이다. 사모님 통장으로 연결된 것이어서 돌아가니 화를 내신다. 현금서비스받아야지 현금 인출은 하면 어떡하냐는 거다. 그 후 알았다 현금서비스는 카드에서 대출 개념으로 돈을 끌어 쓰는 거라는 걸.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사모님 통장의 잔고보다 내 자존감의 잔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천방지축 같았던 나의 막내 생활은 일 년 조금 지난 시간 끝이 났다.

병원은 경영난으로 폐업이 코앞이고, 부장은 병원 돈을 가지고 도망가고, 둘째 언니도 부장에게 천만 원 가까이
빌려줬다는데 돈도 못 받고, 난리 속이다. 사직서를 내고 기다렸지만, 사람을 구하지 않고 버티길래. 야간 퇴근하며


" 오늘까지만 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계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나가면 소문 안 날 것 같아? 이 계통 다 통해, 말 한마디면 취업도 못해. 내가 좋은 말 해줄 것 같아?"


상관없음이다. 둘째 언니는 헤어지는 남자 친구가 스토커처럼 물고 늘어져 맨날 울고 온갖 짜증을 내게 다 냈다. 그냥 나왔다. 그리고 한없이 걸었다. 펑펑 소리 내어 울며 한없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걷고 또 걸었다.


"아이고 아가씨, 왜 이리 서글프게 울고 그래 , "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안타까우신지 말은 건네신다.

모르는 척 지나갔다. 걷고 걷다 멈추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영화관에 들어가 실컷 울고 나왔다.


집으로 와서 퇴사를 알렸다.

나는 돈보다 더 소중한 '인간의 존엄'을 먼저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 하얀 건물의 첫 번째 검은 기억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의 퇴사 방식이 첫출발부터 이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통보하고 그냥 나오기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