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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Feb 26. 2023

그 사람의 몸을 먹고...

<구의 증명>을 읽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충격적인 내용, 오직 그 하나로 나는 <구의 증명>을 읽기로 결심했다. 아직 책의 결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어떤 결말이든 이 책이 내게 적지 않은 무언가를 선사해 주리라는 예상에 짧게나마 글을 쓰기로 했다. 책을 읽던 중 나는 어떤 문단에 멈추고, 어떤 문단에 멈추고, 어떤 문단에 멈추기를 반복했다. 길을 걷다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보고 우뚝 멈춰 서는 사람처럼 문단 몇 개에 우뚝 멈춰 선 나는 그 멈춤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깨닫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했던 건 그 멈춤의 대략적인 원인은 내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혐오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실한 이해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다 못해 그 사람과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을 슬퍼해본 적이 나는 아직 없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 햇살 아래 오소소 돋아난 보얀 솜털, 거친 피부에 일어난 희부연 각질, 정돈되지 못해 부은 얼굴, 그러니까 그 사람의 몸과 살결과 세포 그리고 정신 하나하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난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남겨진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행동할까.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과 공허에 허우적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져 회피하듯 그런 생각을 시작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이 책 덕분에 나는 그동안 피해왔던 나의 사색의 도화선을 다시 지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난 그 죽음을 견딜 수 있을까.


'먹고 싶은 만큼의 사랑'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정의부터 내리려고 했다. 처음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소중한 신체를 소중히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렇다면 '소중히 보내는 것'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졌다. 죽은 사람을 '소중히 보내는 것'의 정의는 누가 정한 것인가. 차가운 땅에 묻는 것? 뜨거워 견딜 수 없을 불길에 내던지는 것? 그러니까 그 사람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


한때 내가 핥고 빨았던 그 누군가의 아름다운 혀와 몸과 손과 팔을 차가운 땅에 묻는 걸 상상하니 그것은 절대 '소중히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람의 텅 빈 육체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를 '소중히 보낼' 수 있을까.


<구의 증명> 속 담은 죽은 구를 먹는다. 요리를 하지도 않고 신체 부위 어느 곳을 버리지도 않는다. 빠져나오는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삼키고 그의 성기와 눈알까지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그를 먹는다. 죽기 전 구는 담에게 '네가 죽으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고 말한 적 있다. 그녀는 죽기 전 제게 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그제야 알 수 있던 그 문장의 말을 깨우치며 그를 먹는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사회적 잣대로 보았을 때 미친년이고 사이코패스일 것이라 단정한다. 그런 담을 보는 일반적인 독자들 입장에서도 역시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먹는지'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뜨거웠던 그 살결이 차가워졌을 때. 총명하게 빛났던 그 눈동자가 텅 비었을 때. 내 몸을 쓰다듬던 그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 천천히 그런 상상부터 시작하여 담의 심정을 파악하려 하니 그제야 서서히 무언가가 진행되었다. 사랑하다 못해 그 사람이 내가 아니란 것이 슬프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니란 것이 슬프고, 우리 둘은 결국 타인이며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플 만큼의 사랑을 가까스로 상상했다.


그리고 상상이 깊어지자 그런 사람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과도 다름없다는 결론에 치달았다. 차라리 텅 빈 그 누군가의 육체가 내 몸에 형태 없는 무언가로 흡수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운 땅과 뜨거운 불에 맡길 필요 없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를 무정한 어딘가에 보내지 않고, 하나 되지 못해 슬펐던 나에게 고스란히 흡수되면 얼마나 좋을까.


원칙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의 몸을 먹는다 해도 그 사람의 살점은 대변으로 모두 배출될 터였다. 하물며 '나'조차 주기적으로 세포가 바뀌고 살갗이 바뀌어 지금의 내가 진짜 '나'인지, '나'란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헷갈리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살점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죽은 그가 영원히 내 몸속에 함께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출이나 살점 이런 것들이 아니다. 매일같이 안고 쓰다듬었던 그 육신을 땅과 불 같은 곳에 차마 보낼 수 없어 내 입으로, 그의 살갗에 제일 익숙할 내 입으로 욱여넣는다는 것일 뿐이다. 담은 외려 갈수록 너덜너덜해지는 구의 시신을 볼 수 없어 하루빨리 그의 살점을 먹어치우길 원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엄청난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으나, 그와 반면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형태의 사랑 또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 사랑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 누구도 사랑의 형태와 분위기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다. 아니, 정의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사랑을 무작정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정확히는 아름다워야만 하는 숭고한 무언가로 여긴다. 하나 사랑은 분홍빛의 꽃과 같은 형태뿐만 아니라 잿빛의 먹구름일 수도, 시커먼 석탄일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어떤 이들의 혐오스러운 사랑의 형태에 대해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러는 당신은 당신의 사랑의 생김새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나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먹는다는 충격적인 상상을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다음에 남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이를 '소중히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상상해 보았다.


 그를 절실히 사랑하다 못해 먹어버렸다는 누군가의 고백을 그 언젠가 듣게 된다면 나는 어떠한 표정을 짓게 될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 사람을 차마 차가운 땅에 묻히게 할 수 없었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난 어떤 말을 할까.


온몸이 다 부서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그런 고백을 하는 담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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