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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06. 2022

현이도 (조영석)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장기와 바둑이라도 하는 게 현명하다

현이도(賢已圖) - 조영석(출처 : 공유마당 CC BY)



하루 종일 배부르게 먹고, 마음을 쓸 곳이 없다면 곤란하구나. 장기와 바둑이 있지 않느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그것이라도 하는 게 현명하다.

(양화편 飽食終日 無所用心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 猶賢乎已 포식종일 무소용심난의재 불유박혁자호 위지 유현호이)


 위 구절에서 장기와 바둑으로 해석한 한자의 원문은 박혁(博奕)입니다. 보편적으로 혁은 바둑을 말하는데, 박은 엄밀히 말하자면 장기는 아닙니다. 박은 고대 사람들이 즐겼던 놀이로 유물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겨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집 잃은 개 2》, 2012) 사람들이 박이라는 놀이를 하면서 내기를 자주 했는지 이 글자는 도박(賭博)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국내의 《논어》 번역문에는 현대인들이 박을 이해하기 쉽게 장기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누구에게 장기나 바둑이라도 두라고 얘기했을까요? 그의 제자들은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기에 그 말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문장의 내용만으로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합니다. 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는 문장의 앞부분입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에 맞는 사람은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부류입니다. 지금과 달리 고대의 농경 사회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신분에 맞는 생업에 종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간단히 해석하자면 놀고먹는 단순한 삶에 대한 질책도 되고,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하면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폐단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공자는 사람을 이롭게 만드는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지는 예악을 알맞게 즐기는 , 다른 사람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그리고 현명한 친구가 많은 것입니다.(계씨편 益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익자삼요 요절예악 요도인지선 요다현우 ) 현명한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현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쉽게 현명한 친구를 사귀는 방법입니다. 공자는 사람에게 해로운 즐거움으로 교만으로 기쁜 , 빈둥거리는 , 잔치에 빠지는 것을 꼽았습니다. 공자가 말한 잔치를 요즘의 말로 바꾸면 '의미 없는 잦은 술자리' 정도   같습니다.


 이로운 즐거움이나 해로운 즐거움에는 모두 공통적으로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들어 있습니다. 어울림에서 비롯된 해로운 즐거움은 흥청망청하는 쾌락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쾌락은 짧은 순간 머물다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지나치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운 즐거움은 함께 성장하는 건전한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어울림은 아무리 지나치더라도 해로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를 밝게 만듭니다.




 〈현이도(賢已圖)〉란 제목은 《논어》의 윗 구절 ‘안 하는 것보다 현명하다’(猶賢乎已 유현호이)에서 따왔습니다. 그래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그림에 〈현이도〉라는 제목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러한 작품은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이공린(李公麟)이 그리고 난 뒤에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조영석의 〈현이도〉는 상황에 따른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으로 분위기가 살아 있습니다. 장기에 빠진 양반들에게 고상함은 없습니다. 어린이가 게임을 하듯 승리에 대한 갈망만 있습니다. 갓을 쓴 양반은 엉덩이를 들고 쪼그려 앉아 있고, 상대편 양반은 팔을 바닥에 짚고 비스듬히 앉아 장기판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몇 개 남지 않는 장기알로 보아 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누가 이기고 있는지 추리를 해보아도 재미있습니다. 그림은 나무의 줄기도 꽤 세심하게 표현하고 구도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구경꾼들의 배치로 전해지는 생생한 현장감이 장점입니다.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점이 높기 때문에 마치 관중석에 앉아서 농구나 배구 같은 스포츠를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림 하단에는 한 남자와 쌍륙(雙六)이라는 전통놀이가 보입니다. 쌍륙은 주사위를 굴려서 말을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놀이입니다. 기원전에 생겨서 전 세계로 퍼졌으니 요즘에 즐기는 보드 게임의 원조나 마찬가지인 놀이입니다. 바닥에 놓인 커다란 멍석 위에 장기판과 함께 쌍륙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저곳은 요즘의 오락실과 같은 장소인 셈입니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화가가 쓴 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예술품 수집가였던 김광수(金光遂)가 자신의 소장품이었던 청나라 화가 유령(兪齡)의 작품 2점을 조영석에게 주고 〈현이도〉를 그려 달라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에 조영석의 그림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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