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자유주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 만능엔터테이너 엄정화와 안타까운 사고로 고인이 된 김주혁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홍반장’은 제목을 듣는 순간부터 개봉하면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 마음먹었던 영화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짐작하겠지만, 학창 시절 내가 곧 ‘홍반장’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학급 임원이 다소 명예직처럼 느껴졌던 것과는 달리, 중고등학생이 된 후로 반장의 역할은 교실의 온갖 잡일을 진짜로 해내야 하는 봉사직이었다. 선생님과 급우들과의 의사소통 창구이자, 각종 대금 (단체사진 값, 크리스마스씰 판매 대금, 체육복에 이름을 새기는 오바로크 비용, 공동구매하는 가정 준비물 구입비 등)을 걷고, 체험학습을 가면 출석체크까지 해야 하는 만능캐로써 소임을 다하던 나는 뼛속까지 ‘홍반장’이었다.
대학교 기숙사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삼성 코엑스 극장에서 조조할인에 TTL할인까지 더해 단돈 1500원에 본 ‘홍반장’은 뻔한 듯 하지만 나름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꽤 괜찮은 영화였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부과대 – 과대 - 과학생회장까지 (별책부록으로 동아리 회장도 있음) 점진적으로 승진(?)하며 온갖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이 영화의 영향으로 한동안 대학 친구들에게도 ‘홍반장’으로 불렸다. OT나 MT를 추진하고, 동기들의 임용고사 원서를 모아 접수하며, 휴강이나 공강에 관한 공지 문자를 보내기도 하며 나름 쓸모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 둘 낳고, 평범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내가 홍반장이었음을 잊고 살게 할 만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데 며칠 전, 둘째 아이와 나의 기침이 낫지 않아 방문한 이비인후과에서 어떤 동화책을 한 권 발견한 순간 내 안에 있던 홍반장이 뛰쳐나왔다. 키즈프랜들리한 소아과가 아니었기에 따로 비치된 동화책 코너 같은 건 없는 평범하고 깔끔한 이비인후과인데 호흡기 치료 장치가 놓인 테이블 한 켠에 두 권의 어린이용 도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1시간이 넘는 지루한 대기에 아이가 몸을 베베 꼬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저 책 가져와서 볼까?” 하고 가져와 살펴보니 한 권은 학습만화이고 다른 한 권은 낙타에 관한 동화책이었다. 제목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선유도서관’이라고 적힌 바코드 스티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들르는 내 단골(?) 도서관 책이 여기에 있다니... 누군가 놓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불현듯, 몇 주 전 문래도서관에서 빌렸던 아이 책이 증발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반납한 것 같은데 도서관에서는 연체되었다고 하고, 집을 아무리 뒤져도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당근’에서 3천 원에 구매해서 도서관에 돌려주었던 쓰라린 기억. 두 곳 이상의 도서관에서 네 명의 아이디카드로 다양한 책을 빌려보고 반납하다 보니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있긴 했었지만 막상 닥치니 무척 속상했다.
책을 뒤적이는 아이를 옆에 두고, 선유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해당 책을 검색해 보니 9월 16일이 반납 예정일이었고, 11월 초 현재 미반납 연체 상태였다. 누가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달도 더 전에 이비인후과에 방문했다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이 책이 여기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겠지? 당근에서 검색해서 이미 구매했으면 어떡하지? 인기책이 아니라 새 책을 사야 할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이 책을 꼭 선유도서관에서 반납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갑작스럽게 말하기는 좀 쑥스러워서 진료를 다 본 후, 처방전을 받고 수납하며 간호사 분들께 넌지시 내 뜻을 전달했다.
- 저.. 이 책 제가 선유도서관에 반납해도 될까요?
- (놀란 토끼눈을 뜨며) 아. 그거 환자분이 두고 간 건데..
- 한참 되었죠? 찾으러 안 오시죠?
- 네네. 연락 없으셨어요.
- 선유도서관이 바로 저희 집 앞인데, 괜찮으시면 제가 내일 반납해 드릴게요.
- 어머.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간호사 두 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기까지 하며 활짝 웃어주셨다. 그걸로 되었다. 이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했던 시간과 내가 이 책을 반납하며 드는 약간의 수고는 두 분의 미소로 대가를 모두 치른 것이다. 책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이 책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모를지라도 이 병원에서 굴러다니며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동화책을 제자리에 돌려준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그리고 간호사분들의 – 별로 걱정하지 않으셨을지 몰라도 – 작은 걱정거리를 덜어드렸으니 행복했다.
다음 날, 내 아이의 예약 도서를 빌리러 퇴근길에 선유도서관에 들렀다. 그냥 기계 앞에서 셀프로 반납해도 ‘연체도서’라는 메시지와 함께 반납처리가 될 테지만, 예약 도서 때문에 어차피 사서님과 대면해야 하니 전날 습득한 책을 내밀며 이런저런 사연을 설명했다. 책을 받아 든 사서님과 옆에서 사연을 들은 두 분이 함께 몸을 일으키며 가까이 오셨다. 나를 바라보고 웃으시며 가져다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하셨다. 나는 혹시 반납된 줄 모르고 계실 수 있으니 따로 연락을 주시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책을 잃어버리신 분이 이 소식을 듣고, 잠시나마 마음에 훈훈함을 느끼시면 좋겠다.
우리 아이가 빌렸다가 사라진 ‘뼈뼈사우르스 3권’은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나처럼 문래도서관 바코드를 보고 도서관으로 갖다 주시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 안에 있는 홍반장 또는 김·이·박반장의 오지랖이 일으킨 작은 기적이 아닐까? 돌이켜보니 문래도서관 앞에 몇 주간 비 맞으며 방치되어있던 유아용 자전거를 보고, 사진 찍어 동네 커뮤니티에 올린 기억이 났다. ‘자전거 주인은 찾아가세요~’라고 올려두고 댓글도 없어서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뒤늦게 쪽지함을 비우다가 자전거 주인으로부터 온 고맙다는 메시지를 발견했었다.
사람 참 안 변한다더니, 나는 여전히 홍반장으로 사는 게 퍽 재미있다.
* 덧붙임 : 뼈뼈사우르스는 어제 우리집 차 트렁크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