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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하지 않을 자유

파워 J의 소심한 반격

by 계쓰홀릭 Mar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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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던 봄이다.

  둘째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활 적응을 돕기 위한 나의 마지막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3월 1일 부터이고, 사실상 지난 2월 중순부터나 다름없었지만 본격적으로는 아이들의 개학식 및 입학식이 있었던 오늘이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살 터울의 첫째 아이가 입학할 때도 휴직을 잠시 했었기에 그사이 약 18개월가량의 근무기간은 '다음 휴직'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2년 전, '육아휴직'이 아닌 '자아휴직'이라는 부제를 붙여가며 야심 차게 온갖 계획을 세웠던 나. 평소에도 MBTI검사를 하면 늘 변함없이 J(계획형)가 나오는 나이기에 사실상 작년 겨울 무렵부터 머릿속의 여러 엔진 중 하나는 휴직계획을 세우기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시간과 체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재봉틀로 옷 많이 만들고 원단 소진하기

  단편소설 쓰고 공모전에 내기

  꾸준히 운동하기

  책, 영화, 전시 즐기기

  포토북으로 사진 정리하기

  좋은 계절 가족여행 떠나기

  온라인 강의 수강하기



 만드는 사람

  꽤나 오랜 취미였던 재봉틀은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마구 어질렀다 치웠다 하며 하루종일 해야 제 맛이다.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짬짬이 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워킹맘 생활을 하면서는 온전히 즐기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그간 입혔던 옷도 작아지고, 이제 곧 날씨가 풀릴 것이기 때문에 봄옷을 반드시 만들어내야만 하는 3월이다. 봉틀러들 사이에서는 이것을 '생계형 재봉'이라고 부른다. 이제는 시간도 생길 테니 늘 만들던 스타일 말고 새로운 패턴도 뜨고 싶고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아직 마음만 굴뚝같다. 둘째 아이 적응시기만 지나면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될 듯한, 비교적 문턱이 낮은 미션이 재봉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는 사람

  앞서 말한 '자아휴직'시절, 수줍게 동네 도서관 문을 두드리며 입문한 글쓰기의 세계도 놓칠 수 없다. '소소한 에세이'로 시작해서 작년에 '내 이야기가 소설이 될 수 있을까?', '단편 소설의 세계'(모두 상주작가 프로그램의 제목임)로 바통을 이어가며 과제와 합평에 의지하는 글쓰기를 하던 나는 그때 잠시 마음이 반짝거렸던 것 같다. 요즘은 글쓰기 모임이 아니면 혼자만의 힘으로 글을 써내지 못하는 '글태기'를 만나 방황 중이다. 당시 작가님이 추천해 주신 각종 작법서들은 대출과 반납을 반복하기만 할 뿐 제대로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화장도 못하고 출근해서 퇴근과 동시에 애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육퇴 후 맥주 한 잔이 낙이던 워킹맘 시절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통했는데 휴직기간에는 "낮에 글 안 쓰고 뭐 했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궁해질 듯하다. 에세이는 꾸준히 쓰면서, 소설스러운 꼴을 갖춘 어떤 글들을 두세 편은 써내야 하지 않을까 하며 혼자 조바심을 내고 있다. 목표가 있으면 좀 더 열심히 쓰는 편이라, 공모전도 기웃거려봐야 하는데 이것 역시 손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으니 말이다.

  

운동하는 사람

  꾸준히 운동하고 싶은 종목을 찾기 위한 나의 고민은 아마도 평생 이어지지 않을까? 수영, 달리기, 댄스, 요가 등 주변에서 할 만한 건 뭐든 떠올려가며 상당 기간 서치 해보았다. 결국,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여성 전용 운동센터를 등록함으로써 무엇을 할 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필라테스, 요가, 플라잉요가, 번지핏 등 재밌어 보이는 프로그램들로 시간표가 꽉 차 있는 곳이다. 당장 내일부터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재미를 느끼며 다닐 수 있을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

  

배우는 사람

  작법서뿐 아니라 관심 있는 작가님들의 단편/장편 소설을 닥치는 대로 방해받지 않고 읽고 싶은 꿈. 어린이 취향이 전혀 아닌 으른의 전시를 보러 가서 몇 시간이고 꼼꼼하게 감상하는 희열. 사진첩 가득 쌓여만 가는 매일의 일상을 - 용량 부족으로- 삭제하기 전에 포토북으로 묶어서 보관하고자 하는 오래 묵은 나만의 숙제. 그 외에도 온라인 강의로 들어보고 싶은 건 캘리그래피, POP, 성우수업(발성과 발음), 이모티콘 작가되는 방법 같은 것들이 있다. 다정(多情)도 병이라는데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것도 병이 아닐는지.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첫째가 계속 질문을 던진다.

   "엄마, 이번에 휴직하면 뭐 배울 거야?"

   "일단 너네를 새로운 스케줄에 적응시켜야지."

   "그러고 나면?"

  "음... 아 모르겠어. 너무 고민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쉬어보면 안될까?"

   "오, 그것도 좋네~"

   

쉬는 사람

  당장, 개학식과 입학식이 있었던 오늘 하루 나는 너무나 바빴고 수고가 많았다.

  지난주에 추운데 꾸역꾸역 나가서 6개월짜리 운동센터를 등록한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내일 있을 글쓰기 모임에 내놓을 글을 한편 더 쓰기 위해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노트북을 펼친 지금의 나도 장하다.

  불혹의 나이에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야무진 나는 꽤 귀엽기까지(?) 하다.


  그동안 파워 E로 살았던 나, 이번 휴직 때는 일단 집순이 모드로 쉬고 놀고 운동하면서 별다른 계획을 잡지 않고 재미나게 시간을 낭비해야겠다. 촘촘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놓으면 갑자기 뭘 하고 싶을 때 스케줄이 부딪히는 일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일단 내일도 학기 초라 짐이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을 위해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도복과 영어학원 가방 셔틀을 해주려고 한다. 현재 거실에 쌓여있는 보따리 종류만 해도 여덟 가지가 넘어서 자칫 잘못하면 배달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폭풍 같은 이번 주가 지나가고 나면 다음 주부터는 무엇을 할지 미리 계획하지 않을 셈이다.


  열심히 일한 나님!

  누려라!!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을 자유를~


  꼭 뭐를 해야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ps. 계획하지 않을 것조차 계획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J형 인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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