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다이어트 점빵
우유팩을 모은다고요?
재작년 가을, 짧았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려고 하니 1학년 담임이 교체되는 자리에 덜컥 들어가게 되었다. 중간 교체 담임 자리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조금 겁이 났지만, 일단 저번 선생님이 하시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인수인계날 학급의 크고 작은 룰을 귀담아 들었다.
‘매일 점심밥을 남김없이 먹으면 칭찬봉 2개, 밥이라도 다 먹으면 칭찬봉 1개를 지급하고, 칭찬봉은 아이들 사물함 색종이컵에 모은다. 10개가 모아지면 양손에 다섯 개씩 쥐고 나와 제출하고 스티커를 발급받는다. 스티커는 독서기록장 뒤쪽에 붙인다. 학교에서 자체 제작한 스티커가 모자라면 교무실의 김OO 실무사님께 요청한다. 칭찬봉은 급식 외에도 다양한 칭찬 상황에서 재량껏 나눠줄 수 있다.’ 하는 칭찬봉에 관한 꽤 복잡한 규칙부터 누구랑 누구는 다문화 가정 아이이고, 누구랑 누구는 학습 속도가 좀 늦다.... 등 당장은 다 외우기 어렵겠지만 차차 파악할 수 있겠다 싶은 정보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함께 천천히 교실을 둘러보다가 우유팩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차곡차곡 쌓여 있는 코너를 발견했다.
"이게 뭐예요?"
"아... 우유팩 모으면 쓰레기봉투로 바꿔주는 거 알아요? 쓰다점빵이라는 데가 있는데 목요일마다 와요."
"쓰다점빵이요?"
"5학년 임OO 부장님이랑 나는 이런 거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데, 힘들면 꼭 안 해도 돼요."
"쓰레기봉투는 바꿔와서 어떻게 해요?"
"15장 모이면 아이들 한 장씩 나눠줘요. 그게 뭐라고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아... 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이미 잔뜩 모여 있는 우유팩 묶음이 신경 쓰였다.
*
어색한 첫 만남의 날, 감사하게도 전(前) 담임선생님이 준비해 주신 활동지들로 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아이들은 다 마신 우유팩을 평소처럼 우유바구니가 아닌 별도의 노란 바구니에 제출했고, 점심을 먹고 난 후 "선생님, 칭찬봉 주셔야죠." 하고 나에게 알려주었으며, 사물함 색종이컵에 칭찬봉을 챙겨 넣은 후 하교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어색한 건 나뿐이고 아이들의 일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전임 선생님이 모아두신 우유팩이 몇 장인지 세어보니 50장이 조금 넘는 양이었다. 50장씩 세 묶음을 모으면 쓰레기봉투 3장으로 바꿔준다 하셨는데, 교사용 책상 서랍에 모여있는 쓰레기봉투도 몇 장 있으니... 15장이 모이면 그때까지만 하고 그만둬야겠다 결심했다.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나눠주는 날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만하겠다고 선언하면 될 일이었다.
우유를 안 먹는 아이들도 몇 있으니 하루에 13개 가량의 우유팩이 나온다 치면 일주일에 65개. 한 달에 약 260개. 최대 150개씩 모아서 쓰다점빵에 가니 석 달에 네 번 정도 갈 수 있는 양이다. 석 달만 더 하면 되겠다는 대강의 계산이 나왔다.
매일 아이들 하교 후 우유팩 열댓 개를 세척하고 창틀에 엎어놓고 가면 다음날 아침에 바짝 말라있었다. 아침 독서 시간에 부지런을 떨며 쫙쫙 펼쳐놓지 않으면, 이틀만 지나도 40여 개의 우유팩을 펼쳐야 하니 미룰 수가 없었다. '이 바쁜 와중에 이걸 매일 하셨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150개가 모아지는 날 쓰레기봉투 석 장으로 바꿔오는 쾌감은 은근히 중독적이었다.
그만하면 안 될까?
드디어 15장이 되던 날!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석 달 동안이나 열심히 씻고 말리고 펼쳐서 쓰다점빵에서 바꿔왔어!"라고 생색을 내며 나눠주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어렵게 꺼낸 말에 아이들은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선생님은 집이 멀고 아이가 어려서 퇴근을 일찍 해야 하는데, 이 동네 쓰다점빵이랑 시간이 안 맞다. 그래서 집에까지 150장을 가져가서 일부러 우리 동네 쓰다점빵까지 걸어가서 바꿔와야 한다. 그리고 이거 맨날 씻고 말리고 펼치는 거 보통 일이 아니라서 선생님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못하겠다. 앞으로는 각자 집에서 부모님과 하도록 해보자.
내가 생각해도 좀 구차한 변명이었다. 교실에 흐르는 적막과 실망감을 견디지 못한 나는 망설임 끝에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제 우유팩 씻고 창가에 엎어놓는 것을 너네가 하면 어때? 그럼 선생님이 좀 더 해볼까 하는데."
"좋아요! 그건 저희가 할게요."
"어 그래... 고, 고맙구나."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우유팩 모으기는 어쩌다 보니 학기가 마무리되는 다음 해 2월까지 계속되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깔끔하게 헹구지 못해 뽀얀 우유국물이 말라붙은 창틀 청소까지 덤으로 내가 맡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