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말 이성계 장군(8)-고려 무인 차별의 역사
조선은 양반의 한 축이 '무반'이었고, 한때 서인들은 훈련도감 등 5군영을 서인 출신들로 채워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하였다. 기마술, 활쏘기 등 과거 시험 내용들도 쉽지 않았다. 그 이순신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무과 시험에서 낙방한 적이 있을 정도.
반면 고려는 무인을 과거를 쳐서 뽑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보통 싸움 잘하고 껄렁껄렁한 무리들을 데려다 놓고, 문관의 통제 아래 그들을 제어하고자 했다.
고려 초기는 오히려 문관들에게 전략과 지휘법을 가르쳐 주요 장수로 삼았고, 이에 따라 강감찬, 양규 등 유명한 장군들이 모두 문관이었다.
이 틀에서 벗어져 나온 인물이 척준경이었다. 그는 이자겸과 사돈관계로 국정 파트너였고, 후에 이자겸과 틀어져 그를 제거하는 데에도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의 관직은 2인자라 할 수 있는 문하시랑에 이른다.
무인정변은 문인들의 일종의 시기가 불러온 결과물이었다. 고려거란전쟁 시기에도 녹봉 문제로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킨 적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인을 조롱하거나 천시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척준경의 등장을 본 문인들은 심사가 꽤 뒤틀려 있었다.
그후 약 백년간 무인이 집권하는 시기를 거쳤으나 일본처럼 무사 집단이 고려의 지배층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려 후기로 가면 문관-무관의 구도가 약간은 변화하기도 한다. 무관 이성계가 지휘하는 전장에 문관 정몽주가 책사로 따라가는가 하면, 최영 같은 장군은 재상인 문하시중에 오른다.
그러나 최영은 본래 그 가문이 문관 집안으로, 동북면 변방의 이성계 가문과는 완전히 다른 처지였다. 그러니 이성계 장군이 최영과 함께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고, 수문하시중(우의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금수저 최영과는 다른 케이스였다.
이는 200년 전 인물인 척준경과도 비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왕과 이자겸을 둘러싼 내전에서 말도 안 되는 전공을 보여주었던 척준경처럼, 이성계 역시도 왜군과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다.
당당히 재상의 일원이 된 이성계,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 많은 신진사대부들이 따랐던 이성계, 그런 그에게 최영은 요동 정벌에 나서라고 말한다. 4불가론을 외쳤으나 왕은 최영의 말이 맞다고 두둔했다.
그렇게 총사령관인 최영을 개성에 남겨두고, 이성계와 조민수 장군은 요동으로 원정길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