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려 말 이성계 장군(9) 4불가론에 대하여
만주의 활은 적의 갑옷을 뚫기 위해 크고 무거웠다. 반면 고려의 활은 그 해법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그 땅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소뿔을 써서 각궁을 만들었고, 굉장히 어려운 숙련의 과정을 통해 애깃살, 이른바 편전이라고 불리는 화살을 날렸다.
그 활은 몇 백년이 흐른 뒤에도 청나라에 의해 금수 조치가 될만큼 동아시아 전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문제는 이 활은 여름에는 아교의 문제 때문에 위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을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활 문제는 핑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령 요동을 차지한다한들, 그 차지한 요동을 오래 지킬 수 있었던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성계 뿐 아니라, 조민수 등 일선의 지휘관들이 그 전쟁을 무모하다고 판단했던 반면에, 최영은 건국 초기의 명나라를 상대하여 일시적인 힘의 공백 상태였던 만주를 차지할 적기라고 여겼다.
양쪽의 주장들에 전혀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결과는 위화도 회군이라는 참담한 결과로 돌아왔다. 위화도 회군이 아니었더라도, 이성계 일파에게 역심이 있었는지, 제2, 제3의 위화도 회군이 없었으리라는 장담은 하지 못한다.
특히 정도전 일파는 조선 건국 후에는 입장이 바뀌어 요동을 칠 계획까지 세웠던 측면을 볼 때, 위선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인 외교 문제를 발끈하는 마음으로, 충분한 상의 없이 결정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어쨌든 권력의 향배는 빠르게 바뀌었다. 이인임에서 최영으로, 조민수로, 이성계로, 막후의 최고 실력자는 순식간에 변화했다.
전환과 격변의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